부르지 못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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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신문
  • 승인 2015.12.1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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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제주올레 19코스 중 서우봉~김녕서포구

→ 지난 호에 이어 제주올레19코스의 후반부 이야기를 적는다. 

제주올레19코스는 제주공항 동쪽에 있는 조천읍 조천리 조천만세동산에서 출발하여 서우봉을 지나 구좌읍 김녕서포구(어민복지회관, 해녀마을쉼터 부근)까지 이어지는 18.6km 코스다. 이중 서우봉, 너븐숭이4.3기념관, 북촌마을, 숲길, 김녕마을, 김녕서포구를 걸으며 보고 들은 제주 이야기. 

▲ 너븐숭이4.3기념관 앞에 있는 애기무덤

애기무덤과 널브러진 문학비
조천만세동산에서 시작된 제주올레19코스는 서우봉을 넘으면서 후반부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첫 대목에서 너븐숭이4.3기념관을 만난다. 

너븐숭이4.3기념관은 제주에서 일어났던 ‘제주4.3사건’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알려 화합과 상생의 길을 도모하고자 마련한 역사의 현장이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를 기점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 너븐숭이4.3기념관

1949년 1월17일 북촌에서 일어났던 이른바 ‘북촌리주민대학살’도 ‘제주4.3사건’의 아픈 역사 가운데 하나이다. 너븐숭이4.3기념관 일대는 ‘북촌리주민대학살’의 현장이었다. 

너븐숭이4.3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북촌리주민대학살’이 있기 전 1947년 8월13일에 삐라를 붙이던 주민들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쏴서 주민 3명이 부상했다. 1948년 4월21일에 무장대가 북촌리 선관위 사무소를 공격해서 선거기록을 탈취했다. 1948년 6월16일에 북촌포구에서 경찰관 2명이 무장대에게 살해됐으며 같은 해 12월16일은 북촌리 인근에 있는 낸시빌레에서 군인이 주민 24명을 학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북촌리주민대학살’의 날인 1949년 1월17일이 시작됐다.

이날 세화에 주둔했던 군인들이 대대본부가 있는 함덕으로 가던 중에 북촌마을 너븐숭이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죽었다. 무장대에서 보초를 서던 원로들은 군인 시신을 군부대로 옮기라는 명령에 따라 함덕에 있는 군인부대에 시신을 인계하러 갔으나 군인들은 시신을 옮긴 9명 가운데 경찰가족 1명을 제외하고 8명을 사살했다. 

사건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오전 11시 경 2개 소대의 병력이 북촌마을을 포위하고 집마다 들러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 주민을 북촌초등학교에 모이게 하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400여 채의 집이 잿더미로 변했고 초등학교에 모인 1000여 명의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지휘관이 교단에 올라 군경가족을 운동장 한 쪽에 모이게 하고 나머지 사람 중에 빨갱이 가족 색출이라는 명목 아래 학교 주변 당팟, 너븐숭이, 탯질 등으로 수십 명씩 끌고 가서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학살은 오후 4시 경에 끝났다. 

대대장은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다음날 주민들을 함덕으로 다시 모이게 했다. 살아남은 주민들 중 일부는 산으로 도망갔고 일부는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함덕으로 갔다. 함덕으로 간 사람 중 100명 가까운 사람들은 빨갱이 가족을 색출한다는 작전 아래 또 희생됐다. 이렇게 죽은 북촌리 주민이 300명이 넘었다. 

‘북촌리주민대학살’을 증언한 북촌리 주민에 따르면 당시에 동생들을 찾으러 다니다가 소낭밭에서 동생들을 찾았는데 5살 동생은 총은 안 맞았는데 얼어서 죽었고 10살 누이동생은 가시덤불 위에 넘어져 있었고 8살 동생은 이마에 총을 맞았는데 각각 손에 고무신을 쥐고 죽어있었다. 

▲ 너븐숭이4.3기념관 앞에 있는 순이삼촌문학비.

너븐숭이4.3기념관 앞에 애기무덤이 있는데 ‘북촌리주민대학살’당시 죽은 어린아이의 시신을 묻은 곳이라고 한다.  

‘북촌리주민대학살’ 이후 북촌리 사람들은 해마다 같은 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 이후 오랫동안 그 일에 대해 누구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기무덤 주변에 작가 현기영의 ‘순이삼촌문학비’가 있다. 현기영이 쓴 <순이삼촌>의 배경 무대가 이곳이다. 비석들이 땅에 널브러져 있는데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 북촌마을 앞에 있는 다려도.

북촌마을
너븐숭이4.3기념관을 뒤로하고 걷는 길 앞에 바닷가 마을이 보인다. 북촌마을이다. 파란색 지붕이 낮게 드리운 집 울타리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찰랑거린다. 바다와 함께 하는 마을 풍경이 아픈 역사를 품어 애잔하다. 

마을에 북촌항이 있다. 항구 앞 바다에 섬(다려도)이 보인다. ‘북촌리주민대학살’때 일부 주민들이 도망가서 숨어있던 섬이다.

▲ 북촌등명대. 비석에 총탄자국이 보인다.

항구 한쪽에 북촌등명대가 있다. 북촌리 앞바다를 오가는 배들을 위해 불을 밝히던 곳인데 비석에 그날의 총탄자국이 남아 있다. 

햇볕 반짝이는 바다를 뒤로하고 올레길 이정표를 따라 걷다보면 마을을 벗어난다.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본 풍경에 북촌마을이 낮게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다.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르다 보면 북촌리선사주거지유적(북촌동굴)이 나온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 북촌마을. 마을 뒤에 서우봉이 보인다.

동복교회를 지나서 숲속에 있는 넓은 운동장(동복리마을운동장)을 지나면서 길은 본격적으로 숲으로 들어간다. 
   

▲ 북촌마을이 바다에 떠 있는 듯 하다

숲길을 지나 바다 앞에 서다
숲이지만 오르막이 거의 없어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이곳부터 김녕마을 농로까지는 숲길이다. 

나뭇가지가 하늘을 가린 숲길을 걷는다. 하늘이 열리는 곳도 만난다. 거대한 풍차의 날개도 보인다. 

숲길은 흙길도 있고 현무암길도 있다. 뿌리가 드러난 곳에 이끼가 덮여 있어서 숲이 깊지 않지만 깊게 느껴진다. 

▲ 숲길.
▲ 숲길을 걷다가 만난 거대한 풍차.

숲길 끝에서 김녕마을 농로가 이어진다. 얼기설기 쌓은 현무암 돌담으로 구역을 나눈 밭 풍경은 제주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살아온 세월과 살아가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기약까지 품고 있는 검붉은 흙이 밭을 이루고 있다. 밭 위에 낮게 드리운 구름이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 머리를 누르고 있는 듯하다. 무거운 일상을 머리에 인 사람들이 지금도 그 밭의 흙을 밟으며 하루를 보낸다. 

살기 위해 죽여야 했고 살기 위해 살아야 했던 아픈 역사 앞에서 오늘 하루 무엇으로 살아야 하나! 김녕서포구 해녀마을쉼터 앞 바다가 잔잔하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