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9년, 15살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정치를 대리하게 되었다. 당시 집권당인 노론과 그 배후에 있던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는 사도세자에 대한 정치적 공세는 물론, 심지어는 정신병자로 몰아 세자의 자리에서 몰아내고자 했다.
영조도 그 거대한 세력과 음모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게 되었고 사도세자는 8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은 어린 정조까지 제거하려 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정조가 1776년 왕에 오르게 된다.
정조는 아버지의 능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화산 부근에 있던 원래 수원 관아와 민가를 팔달산 아래 지금의 수원 자리에 이주시키고
화성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화성은 정조가 꿈꾸었던 당쟁의 폐해를 없애고 강력한 통치력을 갖춘 왕도정치의 상징이자 당쟁에 희생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기리고
그 혼을 살려 새 세상을 건설하려는 정조의 꿈이 담긴 곳이다.
정조는 재위 기간 중 화성을 30여 차례 찾았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을 찾아 가던 길이었고, 그 다음은 수원 화성을 찾아
가는 길이었으며, 그 가운데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수원 화성에서 치르기도 했다.
정조는 이른바 ‘화성행차 준비위원장’을 영의정에게 맡겼다. 정조의 화성 행차에 동원된 신하 및 군인들이 1700명이었고, 행차 당일
임금의 뒤를 따르던 인원이 6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창덕궁을 나와 남대문을 지나 남영동과 용산을 지나던 정조의 화성 행차 행렬이 한강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놓아야
했다. 그 때 동원 된 배가 500여 척, 배 위에 상판으로 깐 널빤지도 1천여 장이 넘었다고 한다.
배다리를 건넌 정조는 지금의 한강대교 남단 부근에 있는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고 장승배기를 지나 금천구 시흥동(시흥행궁)에 이르러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1번 국도를 따라 수원 화성에 도착했던 것이다.
정조가 건넜던 배다리의 북단은 현재 한강대교 북단에서 약간 서쪽이며 남단은 현재 노량진배수지공원 쯤이다. 지하철 9호선 노들역 3번
출구로 나온 뒤 조금만 앞으로 가면 길 오른쪽에 용양봉저정이 있다.
----------------------------------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