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김시습이 세운 묘는 성승(성삼문의 아버지), 박팽년, 유응부, 성삼문, 이개 등 다섯 기였다. 사육신이 누구인지는
‘조선왕조실록’과 남효가 지은 ‘육신전’에 약간 씩 다르게 나와 있는데, 1977년 서울시가 사육신묘역을 성역화하면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선생의 가묘를 추가로 봉안하면서 사육신묘역에는 7기의 묘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성승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육신전에도 사육신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았다. 또한 원래 있던 그의 묘는 임진왜란 때 유실 돼 없어졌다.)
‘박팽년’ 고문을 받다가 숨을 거두었다. 세조는 숨을 거둔 시신의 사지마저 찢게 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버지와 형 등 일곱
명이 처형됐다. ‘김문기’ 문무를 겸비한 그는 단종 복위와 관련, 군대를 동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또한 사지가 찢겨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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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