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가슴 품고 다시 살아나는 사육신
찢겨진 가슴 품고 다시 살아나는 사육신
  • 나무신문
  • 승인 2011.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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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사육신묘

▲ 홍살문. 세종대왕의 맏아들 문종은 2년 4개월 동안 왕의 자리를 지키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은 왕이 문종의 아들 단종이다. 12살에 왕이 된 단종은 세종대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수양대군이 조선의 7대 왕 세조다. 조카를 죽이고 동생인 금성대군과 안평대군마저 죽음으로 몰아간 세조였다. 그는 최고의 정적이었던 김종서는 그의 집까지 찾아가서 죽였다. 왕이 된 뒤에는 단종 복위와 관련된 사람들 중 40명의 사지를 찢어 죽였다. 참형과 교수형 등으로 죽은 사람까지 합하면 100명이 넘었다. 지금의 용산전자상가 앞 한강 모래사장이 사형장이었다. 처형된 사람들의 시신은 한강 백사장에 버려졌다. 매월당 김시습이 그 시신들을 거두어 지금의 동작구 노량진동에 묘를 만들었다. 그곳이 지금은 작은 공원으로 꾸며진 ‘사육신묘’다. ▲ 사육신 중 ‘이개’의 묘.
당시 김시습이 세운 묘는 성승(성삼문의 아버지), 박팽년, 유응부, 성삼문, 이개 등 다섯 기였다. 사육신이 누구인지는 ‘조선왕조실록’과 남효가 지은 ‘육신전’에 약간 씩 다르게 나와 있는데, 1977년 서울시가 사육신묘역을 성역화하면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선생의 가묘를 추가로 봉안하면서 사육신묘역에는 7기의 묘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성승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육신전에도 사육신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았다. 또한 원래 있던 그의 묘는 임진왜란 때 유실 돼 없어졌다.)

▲ 의절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은 세조의 ‘절대권력’도 어쩌지 못했다. 죽어서 다시 살아난 그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 개’ 단종 복위의 시작이자 중심이었던 그는 세조와는 친구사이였다. 죽음 보다 더한 형벌의 고통에도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고 전한다. ▲ 의절사, 사육신 사당. 누군가 향로에 향을 피우고 갔다.
▲ 사육신묘. 묘와 함께 키 큰 나무들이 많아 숲 향기가 난다. ‘하위지’ 문종 때는 수양대군과 함께 여러 공을 세우기도 했다. 단종 복위와 관련해 결국 수양대군에게 사지를 찢겨 죽는 형벌을 받았다.‘성삼문’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에 오르자 국새를 안고 통곡했다. 불에 달군 쇠로 다리를 뚫고 팔을 잘라내는 고초를 겪다 죽었다. ‘유성원’ 단종 복위의 계획이 발각되자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술잔을 나누고 조상의 사당 앞에서 의관을 갖추고 자결했다. ‘유응부’ 성승, 박쟁 장군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장에서 세조를 살해하려고 계획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사지가 찢겨 죽었다. ▲ 의절사 뒤 쪽문. 저 문으로 나가면 사육신의 7기 묘가 있다.
‘박팽년’ 고문을 받다가 숨을 거두었다. 세조는 숨을 거둔 시신의 사지마저 찢게 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버지와 형 등 일곱 명이 처형됐다.
‘김문기’ 문무를 겸비한 그는 단종 복위와 관련, 군대를 동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또한 사지가 찢겨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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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