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의 꿈
무왕의 꿈
  • 나무신문
  • 승인 2011.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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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 미륵사지

▲ 미륵사지 탑. 백제의 고도 부여 여행을 마치고 익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강 일대에서 발견된 백제의 흔적들, 그리고 웅진(공주) 시대의 백제, 이어진 백제의 역사는 사비(부여) 시대를 마지막으로 단절 된다. 그러나 백제 말기 무왕이 꿈꾸었던 새로운 백제의 수도는 지금의 익산이었다. 무왕은 수도를 부여에서 익산으로 옮기고자 했다. 즉위하고 나서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적 국면을 만드는 한편 귀족세력의 힘을 골고루 나누고 견제하기 위해서 천도를 생각했던 것이다. 익산에 미륵사를 세웠던 게 그 증거다. 계획은 무왕이 왕위에 오른 그 이듬해부터 시작되었다. 익산 금마면에 가면 미륵사지가 있다. 밝혀진 절터가 여의도 공원 보다 넓다. 아직도 그 규모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절의 세부적인 아름다움 또한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무왕이 수도 부여가 아닌 익산에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절을 세운 것은 천도 계획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 미륵사지 전경.
▲ 미륵사지 연못. ▲ 미륵사지 석등 받침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현재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다. 백제의 성왕은 수도를 공주에서 부여로 옮겼고 그 비슷한 시기에 정림사도 생겼다. 천도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발판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천도에 따른 견제세력의 입김을 잠재우고 백성들의 걱정을 없애며 국론을 하나로 모으기에 적절한 것이 종교였으며, 불교가 널리 퍼진 백제에서 큰 절을 세우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의 사상적 구심으로 충분했다. 익산의 미륵사 또한 그 역할을 충분히 할 것으로 여겨졌다.


익산 금마면 미륵사지에서 동쪽으로 5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 왕궁면 왕궁리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 이름이 왕궁리였다는 것이다.


이곳이 어느 시대,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이었는지에 대한 설은 분분하지만, 그 가운데 백제의 왕궁터라는 이야기도 있다.


▲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돌들. 역사적 상상력으로 옛 이야기를 편집한다면, 미륵사와 새로운 왕궁이 불과 5킬로미터 안팎의 거리에 있었다는 말이고, 그것이 백제 말기 무왕 대에 진행되던 국가적인 사업이었다면, 무왕의 익산 천도는 백제 부흥의 새로운 꿈을 담고 추진했던 일임에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도 이전 계획은 계획으로 끝났다. 익산 천도가 성공했다면 백제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미륵사지 드넓은 뜰을 걷고 있는 여행자의 상상이 끝을 잡을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옛 미륵사지 앞에 서있다. 머릿속에서 옛 절의 건물과 석탑, 석등 등이 원래의 모습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상상은 여행자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이미 마음속에는 미륵사 옛 절의 모든 것이 그대로 지어졌으며, 현세에 평등의 세상을 이룩하고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미륵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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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