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증조할아버지는 가락국 왕이었다
김유신 증조할아버지는 가락국 왕이었다
  • 나무신문
  • 승인 2011.03.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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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강구안부터 충무교까지

▲ 구형왕릉.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유신은 어린 시절 지금의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에 있는 구형왕릉에서 시묘살이를 했다. ▲ 구형왕릉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한 참 오르면 유의태약수터가 나온다. 사진은 구형왕릉에서 약수터로 올라가는 시멘트길 초입.
김유신이 제사를 받들었던 구형왕은 가락국의 왕이자,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였다. 구형왕은 521년 가락국 왕위에 올랐다. 당시 가락국 주변에는 법흥왕이 다스리던 신라가 있었다. 신라의 세력은 막강했으며 가락국은 그 세력이 신라만 못했다.


신라와 가락국은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없었고 그 때마다 가락국은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 구형왕은 전쟁 때문에 죽고 피해를 입는 백성을 걱정해서 결국 나라를 신라에 귀속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구형왕의 마지막 선택에 대한 또 다른 설도 전해진다. 구형왕은 신라와 끝까지 싸웠고 지금의 왕산 부근에서 전사했다는 것이다. 당시 구형왕은 ‘나라를 잃은 죄인이기에 돌로 무덤을 만들어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지금 구형왕릉은 돌무덤이다.


▲ 가락국 구형왕의 무덤은 돌무덤이다. 구형왕릉은 높이가 7m가 넘을 정도로 거대하다. 돌로 쌓은 능 주변으로 돌로 담을 쌓아 놓았다.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돌로 만든 능인 구형왕릉은 전해지는 전설 때문에 더 신비하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왕릉의 돌을 헐어버리려고 하자 뇌성벽력이 몰아쳐 왜구가 도망했다는 것이다. 또 깊은 산속임에도 칡넝쿨이 능까지 뻗지 못하고 새들이 능 위에 앉지 않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구형왕릉은 1971년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구형왕릉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다 보면 약수터가 하나 나온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가 이 샘물을 길어다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형왕릉 앞에 유의태 약수터로 올라가는 포장도로가 있다. 차 한 대 정도 지날 수 있는 길인데 가파른 언덕을 계속 올라가야 한다. 구형왕릉 입구에서 유의태 약수터로 올라가는 등산로도 있는데 그 길도 가파르기는 마찬가지다. 다 같이 가파르니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를 따라 걷는 게 좋다. 그 길을 걷다보면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진 곳도 나온다. 차를 타고 간다면 약수터에서 약 300~400m 정도 전까지 차가 갈 수 있으니 그곳까지 차를 타고 가서 차를 세우고 걸어가면 된다. ▲ 유의태 약수터.허준의 스승 유의태와 얽힌 무슨 사연이 있는 곳이라는 데 신빙성은 없는 거 같다.
약수터에 설치된 안내판에는 류의태 선생에 대해 적혀 있다. 그에 따르면 류의태 선생은 1516년(중종11) 산청군 신안면 상정마을에서 출생했으며 허준의 스승이다.


선생의 몸을 제자 허준에게 시술토록 해 해부학의 효시를 이루었고 산청군(당시 산음현) 금서면 화계지구에서 의술활동을 펼쳤다. 왕산에서 나는 자생약초에 류의태 약수터의 물로 탕액을 조제했다. 본 약수는 돌너덜 아래의 서출동류수로 위장병과 피부병 등 치료에 효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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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