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역사의 거리
항일 역사의 거리
  • 나무신문
  • 승인 2010.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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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사동

   
▲ 1) 민영환 선생 자결 터. 2) 서울의 중심점 표지돌. 3) 3.1독립운동 기념터 표지석. 4) 승동교회 전경.
인사동은 전통문화의 거리로 알려졌다. 그러나 인사동의 또 다른 모습이 있었으니 바로 항일 역사의 거리다.
공평빌딩을 끼고 우회전, 공룡처럼 서 있는 빌딩 숲 그늘에 가려진 조형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니 옛 한옥의 문틀과 작은 대나무 등을 빚어 놓았다. 그 밑에는 금속판에 양각으로 글씨를 새겼다.


‘아아 나라와 겨레의 치욕이 이에 이르러…’로 시작되는 글이었다. 읽어 내려 갈수록 글의 내용이 비장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대한제국의 자유와 독립을 이루겠다는 내용이었다. 민영환 선생의 유서였다. 을사조약 반대투쟁 등 항일의 길 위에서 죽음으로써 더 크게 살아나는 길을 택한 민영환 선생은 1905년 11월4일 새벽 시퍼런 새벽하늘을 머리에 이고 그 조형물이 세워진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유서는 그의 뜻대로 각국 공사들에게 전달 돼 일제의 강압적이고 불평등한 을사년 조약이 무효임을 알렸으며, 유서를 통해 그는 동포들에게 자유독립의 길로 떨쳐 일어날 것을 외쳤던 것이다.


조형물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태화빌딩이 있다. 이곳은 3·1독립선언식이 열렸던 태화관 자리다.
 항상 갖고 있었던 사소한 의문 하나, ‘태화관은 당시 유명했던 요리집 명월관의 별관이었는데, 왜 그곳에서 독립선언식을 했을까?’ 향토사학자 김용봉 씨는 그의 글을 통해 태화관은 을사년과 경술년 일제의 강압적인 불평등 조약이 있었을 때 매국노들이 모여 모의를 했던 곳으로, 일제의 강제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은 애초부터 무효임을 알리려는 뜻을 담아 그 곳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승동교회 또한 인사동을 항일의 거리로 만든 주인공이다. 승동교회는 3·1독립운동 당시 학생대표가 모여 독립의 의지를 세웠던 곳으로, 교회 앞에 이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전국에서 모여든 학생 대표들이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누어 준 곳이 승동교회다. 3·1독립운동이 있기 전에 학생대표들이 모여 학생들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했으나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 등 각 종교계와 애국지사들이 뜻을 모아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진행키로 함에 따라 학생들도 뜻을 모았던 것이다. 승동교회 오래된 예배당 앞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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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