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응오의 쇄설/사람
유응오의 쇄설/사람
  • 나무신문
  • 승인 2008.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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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서일까? 박찬 시인의 유고시집 《외로운 식량》에 손이 갔다. 이 시집은 처음 읽을 때는 슬픈데, 다시 보면 아름답다. 슬픈 까닭은 시인 자신이 오래지 않아 세상과 하직할 것을 예감하기라도 했던 것 같은 시편들이 많아서이고, 아름다운 까닭은 죽음을 준비하는 시인의 모습이 담담하기 때문이다.

아직 떠나지 않았니?/ 그럼 내가 알아서 갈게/ 네가 오지 않는다면…/ 어차피 가야 할 곳인데, 싸목싸목 가면 되지 않겠니
-〈귀가〉에서

시인은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그 청자는 다름 아닌 자신인 듯하다. 시인이 다짐하며 가자고 하는 곳은 집이다. 그 집은 ‘눈감땡감으로 갈 수 있는 집’이고, ‘꿈속에서도 가는지 모르게 무의식으로도 갈 수 있는 집’, 바로 본가(本家)다. 본향(本鄕)으로의 여정에 오르려는 시인의 음성은 외롭다. 심지어 시인은 외로움은 자신의 식량이라고까지 한다.
‘외로움만 먹고 사는’ 시인이기에 그의 마음은 타클라마칸 사막만큼이나 삭막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정처 없는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시인의 걸음은 절름발이처럼 절룩거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시인은 주저치 않고 외로움을 벗 삼아 제 갈 길을 걸어간다. 시인이 가야 하는 길은 ‘적막한 귀가’길인 동시에 환한 ‘꽃’길이다.

어디 없는가/ 모가지째 떨어지는 동백같이/ 일생에 단 한 번 하얗게 꽃 피우고 죽어버리는 대나무같이/ 늘 푸른 마음을 가진… -〈사람〉 전문
왜 없겠는가? 동백과 같고, 대나무와 같은 이. 꽃은 져도 그 꽃 그림자는 남느니.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생각이 무슨 솔굉이처럼 뭉쳐/ 팍팍한 사람 말고/ 새참 무렵/ 또랑에 휘휘 손 씻고/ 쉰내 나는 보리밥 한 사발/ 찬물에 말아 나눌/ 낯 모를 순한 사람// 그런 사람 하나쯤 만나고 싶다
- 같은 제목 다른 시 〈사람〉 전문

벌써 저 세상에서 ‘쉰내 나는 보리밥 한 사발 찬물에 말아 나눌 이. 사람은 가도 그 온기는 가슴에 남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