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여행과 상념/예천 삼강주막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예천 삼강주막
  • 나무신문
  • 승인 2008.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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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빚 열 냥 마음 빚 만 냥
▲ 삼강주막 막걸리상

“한 잔 하자구.”
“좋지.”
가는비 내리는 날 우리는 예천 삼강마을 낙동강가 새로 단장한 초가에 앉아 있었다.
꽤 먼 길 돌아오느라 느른해진 몸도 몸이려니와 궂은 하늘에서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이런 날은 아무 이유 없이 따듯한 구들장 아랫목에 엎드려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골목저골목 들락거리며 찾아낸 곳이 삼강마을의 삼강주막이었던 것이다. 

새로 지은 초가는 강가에 있어 정겨웠다. 강둑 아래 아름드리 회회나무가 초가를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은 새 집이 들어서기 전부터의 이집 내력을 말하려고 애쓰는 것 같이 보였다. 이미 자리를 틀고 방안에 앉은 사람들은 나올 생각이 없이 연거푸 술잔을 들이킨다. 집 앞 비닐하우스 안에서도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몇몇은 취해 소리가 높았으며 사내들은 바로 옆 논두렁에 내려가 오줌을 눈다. ‘노상방뇨’가 이곳에서는 어린 날 오줌발 싸움 같은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게 주변을 돌아보는데 방에 상이 빈다. 잽싸게 들어가 자리를 차지한다.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아주 날랜 동작이었지만 자리에 앉으면서부터는 느긋해진다. 한상 시켰더니 만 얼마를 선불로 내란다. 일행의 손이 나보다 빨랐다.

안주는 배추전과 두부 묵 등 세 가지였고, 담근 막걸리를 주전자에 담아 내온다. 그런 술상 두 개에 방안이 가득 찬다. 조금만 움직이면 바로 옆 상에 앉은 사람과 무릎이 달 지경이었다. ‘옛 주막’의 분위기도 이랬으리라 생각하고 있는데, 여기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옛 주막’이 아니던가. 이곳의 이집 자체가 그 옛날부터 있었던 주막집이었다. 비록 옛 삼강주막을 운영하던 할머니도 없고 옛 집도 새집으로 바뀌었지만, 삼강주막은 그 맥을 이어 새 주막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막걸리 한 상에 취기가 오른다.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켰다. 백열전구 아래 술상이 빛난다, 저녁이 되면서 문 밖 공기가 시퍼래진다. 아직도 결혼을 하지 못한 친구와 나는 결혼에 적합한 여성상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 사이 옆자리 손님들이 바뀌었다. 우리는 취했고 손장단으로 무릎을 치며 노래가락을 읊조렸다.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옛사랑~ 텅빈 하늘 밑~’ 제대로 잇지 못하는 가락에도, 생각나지 않는 가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이문세의 ‘옛사랑’을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그 사이 밖은 더 어두워졌고, 주룩주룩 비가 내렸고, 방바닥은 더 뜨끈뜨끈해졌다. 나는 방문 밖을 바라보고 그는 공책을 꺼내 고개를 숙인 채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방 안은 더 환해졌고 밖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