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여행과 상념/전설처럼 그 숲을 이야기 하리라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전설처럼 그 숲을 이야기 하리라
  • 나무신문
  • 승인 2008.05.2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도-비자나무 숲
▲ 비자림숲. 돌비석 뒤 나무가 8백년도 더 산 비자나무다.

성산일출봉으로 향하는 1112번 도로는 나무와 꽃의 도로다. 하늘로 쭉쭉 뻗은 이름 모를 침엽수림이 그 길가에 빼곡하다. 차창을 여니 푸른 풀의 풋풋한 향기가 차 안에 가득 찬다. 우리는 달리던 차를 멈추었다. 그 땅을 밟아 보고 싶었다. 민들레꽃이 풀밭에 성기게 피어났다. 성벽처럼 높게 솟구친 키 큰 가로수 안에 도로와 풀밭과 민들레꽃이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소실점으로 끝나는 그 가로수 길 끝은 또 어떤 세상으로 나가는 문일까? 상상해본다.

드디어 ‘비자림’이다. 산호가 부서진 옥빛 바다보다, 성산의 일출보다, 한라산의 설경보다 누군가는 안개에 휩싸인 비자나무숲을 제주 여행지의 으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던 나는 숲에 안개가 피어오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가 비자나무 숲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한낮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숲을 향해 걸었다. 숲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갔다. 오르막길 없는 숲은 천천히 걷기에 좋았다. 고목의 회갈색과 신록의 푸르름이 어우러진 숲의 색은 신비로웠다. 그 숲에는 간혹 단풍나무도 있었지만 대부분 비자나무였다. 숲길을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간다. 구불거리는 줄기와 가지들이 괴기스럽게 느껴진다. 얼기설기 짜인 저 높은 곳의 나뭇가지가 하늘을 덮었다. 빛도 걸러 들고 바람도 수직으로는 불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의 숲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길을 벗어나 숲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간혹 일었다.

이 숲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813년 됐으니 비자나무숲이 그렇게 사람들의 발걸음을 유혹한 세월은 최소한 813년일 것이다. 이미 죽고 썩어 거름이 되어 새 생명을 일군 더 오래된 나무들의 세월을 더 하면 이 숲의 유혹은 아마도 천년은 넘었을 것이다.

3천 그루에 가까운 비자나무와 몇몇 다른 종류의 나무들 그리고 비자란, 풍란, 콩짜개란 등 각종 난들이 서식하는 이곳은 세계 최대의 비자림 군락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비자나무숲이 여행자를 유혹하는 것은 세계최대의 그 무엇이 아니라 숲이 내뿜는 기운 때문일 것이다. 느긋한 걸음으로 걷다가 멈추고 쉬다가 다시 걷는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눈길을 준다.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 내가 서 있는 지금 여기에 땅에서 풀숲에서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 오른 다면 어떨까. 그 누군가 내게 이야기 했던 ‘안개 피어나는 비자나무숲의 아름다움’을 상상해 본다. 

안개가 미처 숲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때 왔어야 했다. 이른 아침 하늘을 가린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오는 햇볕 기둥이 안개에 닿아 퍼질 때 그 숲을 보았어야 했다. 땅으로, 수풀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에 숲만 남고 길은 사라진 비자나무 숲이어야 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은 또 하나의 전설을 이야기하며 제주를 찾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