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꽃이 있는 창80 - 봉숭아에 닿는 사모곡(思母曲)
나무와 꽃이 있는 창80 - 봉숭아에 닿는 사모곡(思母曲)
  • 서범석 기자
  • 승인 2023.05.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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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서진석 박사·시인
봉숭아/봉선화(Impatiens balsamina).

봉숭아/봉선화
봉숭아, 정확히는 봉선화가 여름 한철 내 집 뒤란에 피곤 한다. 물봉선이 고국의 산중에서 물 흐르는 바위 틈에 고개를 비죽이 내밀고 제법 여인의 행색을 보이곤 했는데 이 곳에서도 대하게 되어서 참 반가웠다. 꽃은 생긴 모습대로 보아주어야 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에도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대인 관계에서도 이름을 불러주면 훨씬 관계가 친밀하게 다가온다고 하는 말을 듣는다. 하물며 식물조차 그 이름을 부를 때, 꽃말도 결부하여 그 모습을 이뻐하고 가꾸어 줄 때 이 꽃처럼 여인의 자태로 은근히 안겨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에선 여인들이 손톱에 에나멜 매니큐어를 발라 반짝이면서 인공미를 뽐내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언니, 누님, 어머니, 할머니들이 봉숭아 꽃잎과 백반을 곱게 찧어 밤새 손톱을 싸매어 손톱에 분홍물이 들기를 꿈꾸던 자연미의 모습은 이제 전설이 되어 가고 있는 세상이다.      

히말라야 물봉선(Impatiens glandulifera).<br>
히말라야 물봉선(Impatiens glandulifera).

고향 근처 청암사라는 절이 있는데 절 닿기까지 물이 있는 그늘에도 피어있던 물봉선을 본 것이 기억난다. 아마도 여승이 심지는 않았을 터인데 자꾸만 그 비구니가 이승에서의 자신을 완전히 떨구어 내지 못하고 그 혼을 불러 꽃이 된 것이 아닌가 하여 그 봉선화에게 애틋한 눈길을 주던 것이 어제처럼 선연(鮮然)하다. 

집 앞 화단에는 여름 내 꽃이 피고 맺은 씨를 건드리면 톡 터지기에 봉숭아는 Touch me not이란 이름을 가졌거니와, 우리집 뒤란에 고국의 키 낮은 봉숭아 꽃잎 분위기를 가진 꽃이 윤곽이 작은 투구를 쓴 것 마냥 좀더 선명하고, 키 큰 봉선화가 한창의 옥수수 대같이 마디를 지으며 그 위로 피어난 잎줄기 사이에 피었다.  

또한 우리 봉숭아와 모습이 다른 꽃잎 5개로 자신의 동그란 얼굴 윤곽을 만드는 연분홍, 빨강, 흰색의 뉴기니아/아프리카 봉선화로 알려져 있는 임파첸스(Impatiens)를 이 곳 화단, 화분용으로 꽃가게 또는 편의점(Convinience)에서도 파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고향의 직지천 위쪽의 다리, 황산 가(邊) 감천 위 다리 난간에도 좌우로 긴 화분대에 화사하니 이 꽃을 심어두어 지날 때마다 환하게 인사를 해 주던 게 안 잊힌다. 누가 서양 봉숭아/봉선화라는 것을 알고 심었을까? 물기가 있는 숲 섶, 개울 주변이면 으레 만나는 물봉선까지 봉선화라는 이름으로 대할 수 있어, 오래 전부터 우리 누님, 어머니가 손톱에 물들여 주는 봉숭아에 대한 끌리는 정은 여전히 오랜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프리카봉선화(Impatiens walleriana).

봉숭아에 닿는 사모곡(思母曲)

객창에 달이 차니 수심이 절로 깊다
어느새 우리 어매 달덩이 얼굴 간 데 없고
만릿길 고향 하늘에 하현달이 뜨누나

손톱에 물들이던 봉숭아 피건마는
내밀던 손마디가 당신처럼 굵어졌소
올해도 꽃물자국 밴 어린 손톱 그려요

삐뚤한 글씨체로 보내주던 편지 글이
오늘도 빛 바래어도 따스함 스몄네요
이제는 불러보아도 봉숭아 꽃만 있네요   /
나무신문

 

서진석 박사·시인
서울대학교 1976년 임산가공학과 입학, 1988년 농학박사 학위 취득(목질재료학 분야). 국립산림과학원에서 1985년~2017년 연구직 공무원 근무(임업연구관 정년퇴직). 평생을 나무와 접하며 목재 가공·이용 연구에 전력을 기울인 ‘나무쟁이’. 시집 <숲에 살아 그리운 연가 戀歌>.
현재 캐나다 거주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