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나무 곁에서
학자나무 곁에서
  • 서범석 기자
  • 승인 2022.09.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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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꽃이 있는 창 67 - 글 사진 서진석 박사 

회화나무(Japanese Pagoda Tree, Chinese Scholar Tree)
박상진 교수님이 지은 ‘우리나무 이야기’에 보면 광화문을 돌아가면 나오는 창덕궁 비원(秘苑)의 회화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나무를 이 곳 세미트리에서 만났다.  

무심코 지나쳤는데 8월 어느 날 하얀 모습을 하고 있기에 가까이 가서 보니Japanese Pagoda Tree라고 적혀있다. 나무 전체에 무수한 완두콩 꽃처럼 흰 작은 고깔을 쓴 꽃을 피우고 있다. 귀엽고도 향기로운 꽃을 다는 나무임을 알았다. 다른 나무들이 꽃을 다 피우고 질 무렵 독야청청 하듯 개의치 않고 꽃을 다는 모습에서 느지막이 학문의 길에서 입지(立志)하는 학자의 면모를 느껴본다. 그래서, 그 움츠리지 않은 수세(樹勢)와 함께 회화나무(Japanese Pagoda Tree, Sophora japonica L.)를 학자수(學者樹)라고 부르는 데 이의를 달고 싶지 않다. 

여름도 다 가고 Maple은 빨간 단풍, Sunburst Locust Tree와 Shagbark Hickory가 노란 단풍으로 물 들기에 여념이 없을 때, 이 녀석은 허리가 조금 잘록하게 땅콩 같은 씨앗 집들을 주렴(珠簾)처럼 주렁주렁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다. 

시월의 어느 화창하고 멋진 날에 Edwards Gardens을 갔다. 그곳에서 어디선가 눈에 익은 듯한 나무를 곁에 다가가서 보니 역시 땅콩 집 나무-회화나무-였다. 

젊은 시절 읽은 송영의 ‘땅콩껍질 속의 연가’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줄거리가 정확히 머리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어느 기한을 정하고 부부행세를 하는-계약 결혼을 한- 연인의 애정 심리를 묘사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 집 안(房)에서 잠잘 때 자기 영역을 지키자며 선을 그어놓고, 넘지 말라는 사랑 행각의 대목도 있었던 것 같다. 국민학교 시절 옆 짝꿍과 책상에 가운데 선을 그어놓고, 옥신각신하며 그래도 이마를 맞대듯 공부하며 풋풋한 정을 느끼던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러하니, 학자도 사랑이나 풍류를 아는 김시습이나 김삿갓 정도가 아니겠는가. 당나라 소동파인지도 모르겠고… 여하튼 가까이서 학자의 면모를 갖추어 보여주는 이 나무를 대하고 있음은 조그만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 늦가을, 겨울의 모습을 보고 싶다. 곁불도 쬐지 않으려 했던 남산 딸깍발이의 모습을 잃지 않았으면 하면서…  

학자나무 곁에서

탑골공원을 파고다공원으로 부른다
회화나무를 파고다트리로 부른다
회화나무는 학자수로 불린단다

팔월에 꽃 피우는 나무가 어디 흔하랴

눈 뒤집어 쓴 듯 곁에 가니
완두콩 꽃같은
골담초 꽃 같은
하얀 꽃!
상큼한 향기를 담았으라

팔월의 화이트크리스마스!
눈 꽃 피었다

파고다 공원에
눈 온 정월 대보름 날에
파고다 탑을 돌며
하늘 향해 비원(悲願)하던 누이여!

아들 딸 낳게 해달라고
제주 할멍에게 하듯
기원을 했지

한양길 올라가서
늦게라도 꽃 피우라
어사화(御賜花)로 내려와라

학자수(學者樹)~

낮추어 몸 낮추어 
꽃을 하얀 꽃을 피웠다

팔월에 눈이 왔다
조용한 풍악(風樂) 가운데 
서설(瑞雪)이 내렸다 /나무신문

 

서진석 박사 
서울대학교 1976년 임산가공학과 입학, 1988년 농학박사 학위 취득(목질재료학 분야). 국립산림과학원에서 1985년~2017년 연구직 공무원 근무(임업연구관 정년퇴직). 평생을 나무와 접하며 목재 가공·이용 연구에 전력을 기울인 ‘나무쟁이’. 시집 <숲에 살아 그리운 연가 戀歌>.
현재 캐나다 거주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