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언의 문화칼럼/잊을 수 없는 선생님의 말씀
김도언의 문화칼럼/잊을 수 없는 선생님의 말씀
  • 나무신문
  • 승인 2008.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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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의 소설문단은 김승옥이라는 천재 작가의 등장으로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다.
김승옥 이전의 소설가들은 일제시대에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해서 소설 문장이 고답적이었고, 또한 6.25라는 끔직한 전쟁을 체험해서 지극히 실존적이고 암울한 세계인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김승옥은 달랐다. 그는 한글로 교육을 받은 세대였고 또한 전쟁으로부터도 빚진 것이 없었다. 그는 뛰어난 상상력과 근대적 개인의 정체성을 포착하는 위트, 지적 세련을 동반한 문체로 한국소설에 감수성의 혁명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서울대 불문과 출신이라는 그의 이력도 그의 문재를 보다 눈부시게 비춰준 것은 물론이다.

그는 몇 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한동안 말을 제대로 못하다가 현재는 통원치료중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빚을 진 게 있다.
선생님은 내 결혼식의 주례를 서주신 것이다. 그리 된 데는 내가 당선되던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선생께서 심사를 맡아보신 소이연이 있다. 아니, 아무리 그랬다 해도 내가 작가 김승옥의 문체에 뜨겁게 감염됐던 개인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언감생심 선생께 주례를 청했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선생은 두 번째 통화에서 가난한 작가의 수줍은 청을 들어주셨다. 결혼식 당일, 새벽바람에 서울에서 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오신 선생은 뜻밖에 무척 초조해 보였다. 나는 황송하고 황송했다. 이윽고 주례가 시작됐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선생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선생은 그날 말씀하셨다. “작가는 통장과 전답을 갖지 마라.” 작가란 무릇 물욕에서 자유로워야 참다운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선생의 주례사는 물경 30분 넘게 이어졌다. 검은색 구두코가 봄볕에 타오를 즈음 내 가슴도 크게 일렁였다.
그날 이후 내가 선생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날의 그 뜨거운 기억과 가슴속의 맹세는 아직까지 내 속에서 꿈틀거리면서 스스로를 삼가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