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의 나무~ 측백(側柏)을 보며
내 유년의 나무~ 측백(側柏)을 보며
  • 서범석 기자
  • 승인 2022.06.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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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꽃이 있는 창 63 - 서진석 박사

측백나무(Thuja orientalis L.)
침엽수 중에 측백, 편백, 화백이 있단다. 잎이 그리 바늘잎처럼 뾰족하지 않고 잎 뒤를 보아 X 줄무늬가 있으면 화백이고, Y 줄무늬가 있으면 편백이라고 한다. 삼나무와 편백은 일본의 주수종이고, 고국에서는 삼나무는 제주도에, 편백은 전남 장성에 가면 많이 식재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측백이 우리나라에 보편적으로 많이 식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이곳에서 만나는 측백과 이 계통의 나무들의 학명을 살펴 보면, 수피가 붉은 기운을 띠면서 세로로 죽죽 갈라진 긴 조각을 보이는 Thuja Arborvitae(Thuja standishii(Gord.) Carr.), 또 수피가 회색톤으로 세로로 길게 갈라지고 터짐이 없는 정연한 줄기 모양에다 약간 붉은 기(氣)가 비치는 Eastern red cedar(Juniperus virginiana L.), 씨앗은 측백과 같으나 수피의 갈라진 모양은 Red cedar와 같으나 회색 톤을 띄는 White cedar(Thuja occidentalis L.)가 있다. 그리고 Rocky Mountain  Juniper(Juniperus scopulorum Sarg)가 눈에 띄고, 동글동글한 낙엽송 구과보다는 작은 동글동글한 열매를 단 Sawara False Cypress(Chamaecyparis picifera (S.&Z.) Endl.)도 눈에 띈다. 다양한 수종을 집대성 해놓은 듯한 이곳에서 사계절 꽃, 잎, 줄기, 우듬지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재색이 붉은 색을 띈다 해서 적삼목(赤杉木, red cedar)이라고 한다던데, 회색으로 세로로 얕고 길게 갈라진 껍질을 벗기면 나무의 속살은 붉은 색조를 지닐까? 측백은 껍질이 붉은 톤을 띠고 더 너덜거리는 껍질을 지니고 있다. 이곳 세미트리에서는 부우연 침엽(바늘잎)이 저대로 자라 몸체의 윗쪽이 잘려나간 안쓰러운 소나무도 대하고, 다른 나무에 비하여 자람새가 좋지 않아 안타깝기도 한 낙엽송도 만난다. 토양이나 입지환경이 뭐가 안 맞는지… 

Sunnybrook & Wilketcreek Park에 들어서서 조금 걸어가면 피사의 사탑처럼 평생을 기울어지게 자라온 Cedar로 보이는 나무(本欄의 寫眞) 한 그루를 만날  수 있다. 옹이 자국을 안은 채 규화목(硅化木)처럼 허옇게 바래어 가는 껍질을 보노라면 우리네 삶의 초상화 또는 그림자를 보는 듯하다. 삶의 한 테두리에서는 보통 울타리 경계로 키를 낮추거나 성인 키를 훌쩍 넘게 키워 귀티 나게 관리한 저택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릴 때 시골학교에도 측백이 울타리 대신 바깥과 경계로 측백나무들이 심겨져 있었다. 그 학교의 정문 쪽에 살았는데 아버님이 국민학교-예전에는 초등학교를 이 이름으로 불렀음- 선생님이셨던지라 관사(館舍)에서 우리 가족을 포함해서 세 가족인가 살았다. 관사 내 우리 집 쪽에 키 큰 측백이 한 그루 있었다. 그 나무를 바라보면서 자그만 종모양의 구과(毬果)가 갈색으로 여물어 갓을 떼면 속씨가 사과 씨 마냥 들어있던 것을  신기해 하며 바라보곤 했다. 관사의 나무 껍질(樹皮)이 희뿌였던 것 같아 지금 회상하면 White Cedar 계통의 나무가 아니었던가 해 본다. 다만 그 나무를 측백이라고 알고, 그 바늘잎-비늘잎이라고 해야 할지… 수호신같이 서 있던 나무를 지금도 기억의 언저리에서 발견한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여전히 신비스러움으로 바라보며 착각하는 즐거움은 클 것 같다. 미숙한 눈(視線)이지만 때묻지 않은 직관(直觀)으로 볼 수 있는 시기이기에… 

문득 고흐가 프랑스 생레미 정신병원에 있을 때 그렸다는 ‘삼나무가 있는 밀밭(Wheat field with cypresses)’을 보고 싶어진다. 영어사전을 보면 Cedar는 개잎갈나무(향나무 등 삼나무 비슷한 각종 침엽수), Cypress는 편백나뭇과의 침엽수로 나오는데 그림 제목을 삼나무로 표기하고 있음은 잘못인 것 같다. 여하튼 삶이 어려운 시기에 고흐는 어떤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았던 것일까? 내게도 그러한 치열한 삶을 꿈꾼 적이 있던가.   

내 유년의 나무~ 측백(側柏)을 보며

너를 올려다 보면서 나는 자랐지
하늘 청청(靑靑) 너도 청청(靑靑)
쓰러지지 않는 너를 보며 나는 컸지

겨울이 되어
바람이 시린 문풍지를 흔들며 가면
문풍지에 어른거리던 너의 그림자

멍멍~ 개도 만들고
메에~ 염소도 만들고
엄메~ 송아지도 만들며

호롱불, 등잔불 아래
문풍지에 두 손으로 비추는 
그림자 놀이를 할 때 엄마와 함께 있었지
그 겨울 밤은 품이 있어 춥지 않았지

멀뚱멀뚱 눈을 굴리다가 잠이 들면
내 나무는 바깥에서 내가 일어날 때까지
와들와들 떨며 기다려 주었지

그 추억의 내 나무는 잘 있을까?
아니면 버혀지고 흔적도 없이 되었을까?   /나무신문

 

서진석 박사 
서울대학교 1976년 임산가공학과 입학, 1988년 농학박사 학위 취득(목질재료학 분야). 국립산림과학원에서 1985년~2017년 연구직 공무원 근무(임업연구관 정년퇴직). 평생을 나무와 접하며 목재 가공·이용 연구에 전력을 기울인 ‘나무쟁이’. 시집 <숲에 살아 그리운 연가 戀歌>.
현재 캐나다 거주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