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향 꽈리
그 고향 꽈리
  • 서범석 기자
  • 승인 2022.03.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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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꽃이 있는 창 58 - 글 사진 서진석 박사

꽈리
필자의 졸시에 ‘9월에는 볕냥을 아끼게 해주세요’란 것이 있다. 그만큼 볕이 그리운 9월에 심술보가 놓고 간 쬐그만 풍선 마냥 꽈리가 열었다. 패티김의 ‘9월의 노래’를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9월도 막바지에 있다. 오늘은 추적추적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이 비가 그치면 치륵치륵 가을이 깊어갈 것이다.

볕을 아끼면서 고국에서 가져와 봄에 뿌린 씨앗들이 잎을 피우고 꽃을 피웠다. 그러나 땅심이 부족한 건지 자투리 땅의 공간에서 잎은 무성히 피웠건만 아직 꽃을 보여주지 않는 접시꽃, 노란 꽃이 피었지만 열매를 보여주지 않는 여주가 나를 안타깝게 한다. 올 겨울 뿌리가 살아서 내년에 본 모습을 보여줄지가 관심사인 식물들이 자리를 하고 있는 조그만 공간을 살펴본다. 

이곳은 고국보다 위도가 높아서 매미가 열심히 울어주던 게 엊그제 같은데 뚝 그치고 고향에서 듣던 밤 풀벌레 소리가 그립고, 단풍이 물들어 조락이 예견되는 쓸쓸한 가을로 마차에 몸을 싣고 있다. 

고대 그리스 디오게네스 철학자가 자신을 찾아온 알렉산더 대왕이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자 ‘대왕이시여!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주시오.’라고 하며 단순히 볕을 쪼이고자 했던 말이 생각난다. 곧 다가올 인디언 썸머(Indian Summer)를 기다리며, 다스한 ‘볕냥’을 아끼고 싶어 할 그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먼 이국 독일 땅에서 이미륵이 어머님의 부음을 담은 편지를 받던 날 바라보던 꽈리!

‘언젠가 우체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모르는 집 앞에서 멈춰 섰다. 그 집 정원에는 꽈리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붉은 열매가 햇빛에 빛났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많이 보았고, 어렸을 때 잘 가지고 놀았던 꽈리 열매였다. 마치 고향의 풍경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눈이 왔다. .. (중략) 눈은 우리 마을 송림에 날리던 눈과 똑 같았다. 이 날 아침, 나는 먼 고향에서의 첫 소식을 받았다. 나의 큰 누나의 편지였다. 지난 가을에 어머니가 며칠 동안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는 사연이었다.’<이미륵의 자전적 성장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중에서> 이 비가 그치면 봄에 보고 온 꽈리가 어찌 여물고 있는지 Edwards Gardens에 가서 보아야겠다. 모감주 나무에 봄, 여름 매달던 씨앗 자루 마냥 키 낮은 줄기에 쬐그만 풍선으로 달려있던 꽈리! 나도 어쩌면 그 주황색으로 익어가는 꽈리를 바라보면서 고향에 홀로 계신 아버지를 그릴지도 모르겠다. 

 

그 고향 꽈리

 

저 이국 땅
한 사내가 보았네

뜰에 핀 꽈리

자나깨나 
주먹밥 쥐어주며

주먹처럼
힘차게 살아라고

어깨 감싸 안으시던 
어머니 

자식없는 
문간에
떠난 자식
바라며 

외등 밝혀 
걸어두고

온 밤
온 세월을 
그렇게 사신 
어머니

오늘은 
어이 그 고향 꽈리로 
제 앞에
서셨습니까

 

서진석 박사
서울대학교 1976년 임산가공학과 입학, 1988년 농학박사 학위 취득(목질재료학 분야). 국립산림과학원에서 1985년~2017년 연구직 공무원 근무(임업연구관 정년퇴직). 평생을 나무와 접하며 목재 가공·이용 연구에 전력을 기울인 ‘나무쟁이’. 시집 <숲에 살아 그리운 연가 戀歌>.
현재 캐나다 거주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