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나무신문
  • 승인 2007.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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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송-천 년 강바람 품은 신륵사

눈 내린 북한강을 거슬러 오른다. 강물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잔물결이 인다. 파문이 여울이 되어 강가로 번진다. 강가에 매어 놓은 빈 배 밑창에서 물결이 부서진다. 그때 마다 강가 모래톱에 강물의 나이테가 만들어 지겠지. 그렇게 시작을 알 수 없는 억겁의 세월을 흐르면서도 지금도 강은 처음 같은 얼굴로 겨울 하늘을 담고 있다.

신륵사를 찾아 가는 길에 만난 첫 풍경에서 늙은 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 같다. 길은 계속 강물을 거슬러 오르고 강 건너 저 멀리 있는 능선들이 겹치고 굽이치는 모양에서 산이 맥을 이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멀리 있는 풍경은 그렇게 정지한 듯 달리고 있으며 우리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지만 강 옆 어느 한 곳에 한 점이 되어 멈추어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지금 여기 있지만 없는 것이고, 내가 나를 떠나 저 멀리 한 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만이 유효하다.

차는 6번 국도를 벗어나 37번 국도를 타고 달린다. 그 사이 내가 가는 길옆으로 흐르던 강도 남한강으로 바뀌었다. 시원이 다른 두 물줄기, 하나와 하나가 모여 다시 하나가 되는 물의 이치가 처음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그 처음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내 희망과 다르지 않음을 꿈꾼다.

강물은 겨울에도 꿈을 꾸고 있을까? 모든 것들이 소멸하고 수렴되는 겨울에도 강물은 무엇을 움켜쥐고 있는 것일까? 선 굵은 수묵처럼 흐르는 겨울 강은 그 부드러움 속에 꿈틀거리는 기상을 숨기고 있다. 내 인생을 결정지은 열아홉 살의 첫 여행에서 만난 신륵사. 아직도 그곳은 처음처럼 꿈틀거리며 꿈을 꾸고 있을까?

강바람 걸러질 곳 없는 강가에 신륵사가 있다. 그렇게 천 번의 겨울을 맞으면서 칼날 같은 강바람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거나 고려의 나옹화상이 기이한 행적을 남겼다는 이야기 때문에 절 풍경 소리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자연의 모습이 내가 교감할 수 있는, 그래서 느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내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천 년 전설이 다시 살아난다.

절집 앞 강가로 발길을 옮긴다. 거대한 바위절벽 위에 놓인 작은 돌탑, 그리고 그 탑 옆에 세워진 정자 하나, 이것이 남한강을 마중하고 있는 신륵사의 마음이다. 절은 낭떠러지에 탑을 세워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마음을 새겼고, 정자를 세워 그리움에 사무치는 마음을 풀어 놓게 했다. 절 보다 더 오래 전부터 그곳에 남한강은 흘렀지만 탑을 세운 뒤 남한강은 그곳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맴돌아 흐른다.  

거운리, 섭새, 어상천, 상선, 중선, 하선, 목계, 탄금…. 천리 물길 곳곳에 둥지를 튼 수 없이 많은 마을을 굽이굽이 돌아오면서 밤새 수런거렸던 마을이야기를 안고 흐르는 남한강은 그래서 속(俗)에 가깝지만 비속과 다를 바 없다. 강이 곧 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