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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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신문
  • 승인 2017.01.03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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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제주올레 5코스
▲ 조배머들코지.

#여행 #장태동 #제주올레 #5코스 #서연의집 #쇠소깍 #당일치기

제주올레 5코스는 첫사랑의 길이다. 첫사랑의 마음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 <건축학개론>을 촬영한 ‘카페 서연의 집’이 있기 때문이다. 

출발지점은 남원포구에 있는 제주올레 안내센터다. 이곳에서 출발해서 큰엉 입구, 인디언 추장 얼굴 바위, 큰엉 비석, 신그물, 위미 동백나무군락지, 조배머들코지, 위미1리경로당, 카페 서연의 집, 넙빌레, 망장포, 예촌망, 쇠소깍다리에서 끝난다. 13.1㎞ 거리다. 

당일치기 제주 여행 프로젝트
제주공항에 도착해서 제주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그리고 서귀포시 남원읍까지 버스로 이동, 남원읍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13㎞가 조금 넘는 올레길을 걸어야 하고, 중간에 카페에서 차도 한 잔 하고, 다시 제주시 동문시장을 들렀다가 제주공항으로 가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게 이날 하루 일정이었다. 

과연 가능할까? 나도 궁금했다. 이른바 ‘제주 당일치기 올레길 걷기 및 재래시장 즐기기 프로젝트’였다. 

스스로 마음을 굳히기 위해 제주로 가는 비행기와 제주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는 예매를 했다. 제주행 비행기는 오전 7시, 서울행 비행기는 오후 8시50분, 물론 이 시간 대에 있는 저가항공의 항공료가 가장 싼 이유도 있었다. 

오전 8시가 조금 넘어서 도착한 제주공항에는 싸래기눈이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제주시외버스정류장을 재촉했다. 

730번 버스를 타고 남원포구입구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된다. 버스는 10분 뒤에 출발한다고 했다. 카메라를 점검하고 올레길을 걸을 때 마실 물과 경치 좋은 곳에서 쉬면서 먹을 간식을 준비하기에 10분은 충분했다. 

버스가 출발했고 곧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싸래기눈은 그쳤고 바람이 검은 구름을 세차게 밀어내고 있었다. 간혹 파란 하늘이 보이고 햇볕줄기가 내리꽂히기도 했다. 바람과 구름과 하늘과 햇빛, 날씨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730번 버스가 제주에서 남원포구입구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실어 나른 시간이 1시간20여 분 정도니 남원읍 사거리 김밥집에 앉아서 김밥을 먹고 있는 시간이 오전 10시가 넘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은 예상한 오차범위 안에 있었다.  

▲ 남원포구 앞 바다.

바닷가 절벽에 피어난 보랏빛 꽃 
김밥은 맛있었다. 언제 어떻게 날씨가 바뀔지도 모르고 발길을 붙잡는 풍경이 어디에 얼마나 숨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시간을 아껴야 했다. 

작은 포구 뒤에 제주올레 안내센터가 보인다. 안내센터에서 5코스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를 듣고 출발했다. 

▲ 빗물이 지하로 스며든 후 땅 아래로 흐르다가 땅 위로 솟아나는 물을 용천수라고 한다. 제주 바닷가에는 용천수가 나는 곳이 많다.

작은 아치형 다리에 올라서서 포구 앞 바다를 바라봤다. 볕에도 그늘이 있는지 바다에서 온전하게 부서지는 햇볕이 검게 빛난다. 

원호를 그리며 다가서는 바다 끝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 위를 걷는다. 한파 운운했던 서울의 새벽 날씨와는 판이하다. 영상 2도, 바람을 감안해도 상쾌한 온도다. 

▲ 큰엉.

큰엉 입구가 나온다. 이곳부터 큰엉이 끝나는 곳까지 약 1.5㎞는 바닷가 절벽 위 산책로다. 나무가 터널을 만든 곳도 지나고 전망이 트이는 곳도 만난다.     

큰엉은 바닷가에 15~20m 높이의 기암절벽이 성벽처럼 이어지며 중간에 큰 바위 동굴이 있는 지형을 뜻한다. ‘엉’이란 바닷가나 절벽에 뚫린 바위그늘(언덕)을 일컫는 제주 사투리다.  

산책로에서 절벽이나 바다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병풍처럼 펼쳐지는 바닷가 절벽에 이름이 붙은 바위가 몇 개 있다. 그중 ‘호두암’ ‘유두암’이 보이는 곳을 지나 ‘인디언 추장 얼굴 바위’를 볼 수 있는 절벽 전망대에 섰다. 

▲ 큰엉. 인디언 추장 얼굴 바위.

‘인디언 추장 얼굴 바위’라는 이름은 이곳을 지나던 여행자 중 누군가가 붙였다고 한다. 바위 생김새와 그 이름이 어울리건 그렇지 않건 ‘인디언 추장 얼굴 바위’를 보는 전망대 밖 바위 절벽 끝에 피어난 보랏빛 꽃송이 하나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 한반도 모양.

육지에서는 한파가 기승이고 불과 몇 시간 전만해도 눈이 내리던 제주였다. 이런 계절에 바닷가 벼랑 끝에서 피어난 꽃송이 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 마음은 자유다. 시간은 제 멋대로 흐르고 있었다. 

서연의 집
설레고 먹먹하고 황홀하고 아픈 첫사랑 그 마음이 색으로 나타나면 보라빛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제주도 바닷가 겨울 절벽 끝에서 피어난 보랏빛 꽃송이 앞에서 첫사랑의 마음이 떠올랐던 건 이곳에 오기 전 보았던 영화 <건축학개론> 때문이기도 했다. 

제주올레 5코스 위미리에는 1800년대 후반부터 가꾸어온 동백나무군락지가 있다. 1858년에 태어난 현병춘 할머니가 이 마을로 시집 와서 모은 돈 35냥으로 황무지를 사들인 뒤 한라산 동백 씨를 따다가 심어 키운 게 지금의 ‘위미 동백나무군락지’가 된 것이다. 초록의 동백잎 사이에 붉은 꽃송이가 박혀 아른거린다.  

▲ 위미 동백나무군락지.

위미항에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 항구 옆 작은 연못에 용의 머리를 닮은 바위가 바다를 향해 있다. 그곳 이름이 조배머들코지다. 

위미1리 경로당 옆 전신주에 ‘카페 서연의 집’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850m만 가면 첫사랑의 영화 <건축학개론>을 촬영한 ‘카페 서연의 집’이다.  

▲ 조배머들코지.

‘카페 서연의 집’에 사람이 많다. 앉을 자리가 없다. 카페 곳곳을 돌아본다. 벽에 걸린 사진과 소품들은 영화와 관련된 것들이다. <건축학개론>을 연출한 감독과 남녀 배우 몇몇의 손을 찍어 만든 핸드프린트도 보인다. 

자리가 날 때를 기다렸다가 달콤한 차 한 잔을 마셨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바람은 거르고 햇볕만 통과시키는 유리창 안은 아늑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보이는 것들만 바라보았다. 

▲ 카페 서연의 집은 영화 '건축학개론'을 촬영한 곳이다. 사진은 카페 벽면을 장식한 영화 속 장면들이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서둘러 짐을 챙겼다. 넙빌레를 지나 망장포로 가는 길가에 장미꽃을 보았다. 

큰엉 절벽 위의 보랏빛 꽃, 위미리 동백, 망장포 마을의 장미… 이 길 위에서 계절은 하나  같았다. 아니면 여러 층의 시간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한 순간 영원 아닌 것 없었고, 어느 한 순간이라도 사라질까봐 초조했던 첫사랑 그 시절도 그랬다. 

▲ 한라산이 오름을 품고 오름 아래 사람 사는 마을이 있다.

예촌망이라고 적힌 이정표를 따라간다. 도착지점인 쇠소깍다리로 가는 길 멀리 눈 쌓인 한라산 정상이 보인다. 능선을 하얀 구름이 덮었다. 능선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구름은 산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는다. 

제주올레 5코스 도착지점이자 6코스가 시작되는 쇠소깍다리에 도착했다. 길은 끝났는데 돌아가야 할 길이 온 길 보다 멀게 느껴졌다.  

▲ 제주 올레 5코스가 끝나고 6코스가 시작 되는 지점.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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