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멋과 맛
가을의 멋과 맛
  • 나무신문
  • 승인 2016.11.1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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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서울시 송파구 몽촌토성
▲ 몽촌토성에 있었던 해자를 재현한 몽촌토성 호수.

#여행 #장태동 #몽촌토성 #가을 #천호역 #천고마비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에 가족이 배터지게 먹은 바깥음식이 없으니 작정하고 날을 잡아야 했다. 거리며 산은 가을의 절정을 지나고 있는데 가족끼리 단풍구경 한 번 다녀오지 못했으니 이 또한 날을 잡아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단출한 네 식구지만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들이란 보통 산책을 싫어해서 다른 조건을 걸어서라도 그들의 발걸음을 유혹해야 했다. 

결국 네 식구가 합의한 시간은 한나절, 멀리는 못 가고 지하철 타고 몽촌토성역에 내려 몽촌토성에서 가을볕 좀 쐬고 왔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가을은 멋지고 맛있었다. 

▲ 몽촌토성을 걷다 만난 풍경.
▲ 몽촌토성에서 바라본 북한산 능선.

가족나들이
가족이 몽촌토성으로 나서기 일주일 전에 이른 아침부터 정오 무렵까지 몽촌토성을 돌아볼 일이 있었다. 이른 아침 몽촌토성은 이슬에 젖어 촉촉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하얀 띠가 롯데월드타워의 허리를 감싼 풍경도 보았다. 

▲ 보호수로 지정된 몽촌토성 은행나무.

연막 같이 퍼졌던 희뿌연 안개가 갠 건 다행이었다. 몽촌토성의 단풍은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았다. 낮은 구릉과 호수의 수면 위에서 가을은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처럼 진동하고 있었다.

가파른 길이나 계단을 싫어하는 아내와 산책을 싫어하는 아이들과 함께할 가을산책 최적의 장소가 몽촌토성이었고 드디어 그곳으로 가족나들이를 떠나게 된 것이다.

몽촌토성 지하철역에서 지상으로 나오면 세계평화의문이라는 거대한 건축물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 호수 앞에 도착했다. 

▲ 몽촌토성 토끼.

잔잔한 수면에 비친 단풍이 일주일 전보다 깊다. 호수를 지나 구릉의 언덕으로 올라서려는데 토끼 한 마리가 느리게 뛰어와 사람들 앞에 멈춘다. 경계하지 않는 토끼의 눈빛이 아기의 눈빛 같다. 

몽촌토성 구릉의 주인은 토끼만이 아니다. 언덕 능선을 걸어 다니는 까치도 있다. 그 까치는 그 능선을 걸어 다닌다. 지난주에 혼자 왔을 때도 그 까치는 그 능선을 걸어 다녔었다. 

그 언덕 기슭에 있는 감나무에는 몇 마리의 참새와 까치가 있다. 그것들은 감나무에 달린 감을 쪼아 먹는다. 감을 따는 사람들이 없으니 달린 감이 저절로 떨어지기 전에는 그 나무에 달린 모든 감이 그들의 밥이다. 그들도 이 계절이 천고마비(天高馬肥)다. 

▲ 몽촌토성 언덕에 앉은 까치.
▲ 까치밥과 까치.
▲ 몽촌토성 비둘기.

넓은 풀밭이 나왔다. 그곳에 나무 세 그루가 있다. 하나는 예전부터 ‘나 홀로 나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나무이며, 다른 하나는 낭창거리는 수양버들이고 나머지 하나는 수령이 580년 정도 된 은행나무다. 구릉 언덕 풀밭에 무슨 상징처럼 서 있는 세 그루의 나무를 보면서 언덕길을 걸어서 호수로 내려왔다. 

▲ 몽촌토성 ‘나 홀로 나무’.

길지 않은 시간 길지 않는 길을 걷는 동안 특별한 말이 없었다. 그저 ‘저 하늘 좀 봐’ ‘저 나무 좀 봐’ ‘저 언덕 좀 봐’ 하며 누군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곳을 함께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말 없이 걷는 우리 가족의 길 앞에서 가을도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 몽촌토성 구릉 언덕.

몽촌토성
몽촌토성은 한성 백제시대의 왕도유적 중 하나다. 서진(265~316) 시대의 도기 조각 등이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3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몽촌토성은 해발 45m 안팎의 자연 구릉지에 흙으로 만든 토성이다. 성벽 둘레는 약 2.3㎞다. 토성 위를 걷다보면 백제집자리전시관을 만난다. 이곳은 몽촌토성 안에서 발굴한 건물터 중 4개의 집자리를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 몽촌토성 목책(복원한 것).

토성을 따라 산책하다보면 토성에 있었던 목책을 복원한 것도 볼 수 있다. 목책은 서북쪽과 동북쪽 성벽 밖 비탈에 있었다. 지금 설치된 목책은 실제 목책이 있었던 자리를 추정해 복원한 것이다. 

▲ 보호수로 지정된 몽촌토성 은행나무.

몽촌토성을 감싸고 있는 호수는 옛날에 몽촌토성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던 해자를 재현한 것이다. 해자 둘레는 약 4.6㎞, 수심은 1.5m~2.2m다. 

▲ 억새.

해자를 재현한 호수에 몽촌토성에 내린 단풍이 비친다. 해가 짧아 그림자가 벌써 길어졌다. 싸늘한 바람에 아내와 아이들 걸음이 총총하다. 아이들을 유혹했던 산책의 조건인 햄버거를 먹으러 가야할 시간이다. 

▲ 갯바위바지락손칼국수. 지고추 다진 것을 넣어 먹는다.

맛있는 가을

▲ 갯바위바지락손칼국수.

아이들이 좋아하는 불고기버거세트를 시키면서 내가 좋아하는 데리버거도 슬쩍 곁들였다. 햄버거를 사주는 조건으로 산책에 동행한 아이들이었지만 햄버거를 먹은 다음에 칼국수를 먹어야 한다는 또 다른 조건을 애초에 덧붙였었다. 

몽촌토성에서 멀지 않은 잠실대교 북단 사거리 부근에 ‘갯바위바지락손칼국수’집이 있다. 전에 이집에서 칼국수를 먹을 때 아내와 아이들 생각이 났던 게 사실이다. 

칼국수와 만두를 주문했다. 만두가 먼저 나왔다. 만두가 맛있다. 입맛 까다로운 큰 애도 아무 말 없이 만두 하나를 다 먹는다. 

칼국수가 나왔다. 세숫대야 같이 큰 도자기 그릇에 한 가득 담겨 나온 칼국수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개인접시에 국수를 퍼 담아 나누어 주는 아내 모습이 창밖에서 퍼지는 노을빛에 겹쳐 실루엣으로 빛난다. 

칼국수는 늦가을에 먹어야 제 맛이다. 색 바랜 단풍, 먼지와 엉켜 길바닥에서 뒹구는 낙엽, 보랏빛 저녁 공기를 타고 뼈에 닿는 찬바람, 가을이 이렇게 을씨년스러울 때 열기 머금은 국수가락을 따끈한 국물과 함께 후루룩 입으로 거둬들여 넘기면 그 보다 더 푸근할 때가 없다. 게다가 이렇게 가족이 모여 앉아 배 두드리며 마지막 한 가닥, 마지막 한 방울의 국물까지 다 먹어치우는 저녁이라면 말이다. 

늦가을에 먹어야 하는 음식 중에는 만둣국도 있다. 고기만두가 아니라 김치만두로 끓인 만둣국이어야 한다. 

▲ 천호역 주변 엄마손만두.
▲ 천호역 주변 엄마손만두 주인 아줌마가 만두를 직접 빚고 있다.

칼칼하고 매콤한 김치만두 소와 뜨끈한 국물이 입안에서 어우러지면서 내는 그 맛은 늦가을이 최고다. 

몽촌토성역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천호역 주변에 ‘엄마손만두’집이 있다. 만두와 만둣국을 파는데 김치만두로 만든다. 아주매운맛과 보통맛이 있다. 아주매운맛은 아주 맵다. 

홀에서는 손님들이 만둣국을 먹고 있고 입구에서는 아줌마가 만두를 빚고 있고 주방에서는 주방장이 만두를 찌고 국을 끓이고 있다. 이집에서의 삶은 만두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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