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남한산성
그 해 겨울, 남한산성
  • 나무신문
  • 승인 2016.11.0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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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경기도 광주
▲ 가을꽃 핀 성곽길.

#여행 #장태동 #남한산성 #경기도_광주 #겨울 #인조 #광해군

그날은 남한산성의 사계절을 완성하는 날이었다. 겨울, 봄, 여름의 남한산성 그리고 가을.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남한산성을 찾았다. 그리고 또 하나, 지난 세 번은 남한산성을 일주하지 못했다. 세 번 모두 동문에서 남문까지 구간을 빼먹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동안 걸었던 방향과 반대로 걸었다. 남한산성 안에 있는 남한산성행궁에서 시작해서 남문, 동문, 북문, 서문 그리고 다시 남문을 지나 남한산성행궁 앞 버스정류장까지,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돌았다. 

▲ 남한산성행궁 담장 옆 410년 된 느티나무.

외세에 굴복한 인조를 보았을 느티나무
굴종의 역사가 남아 있는 남한산성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왔고 가을을 즐기는 사람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곽길을 걷고 있었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기도 전에 조선은 또 다시 전란에 휩싸인다.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1627년 조선을 침략했던 것이다. 

명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던 조선은 신흥국가인 후금의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조화로운 외교정책을 펴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왕은 광해군이었다.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낸 명나라를 돕지 않을 수 없었지만 강력한 후금의 세력도 간과해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이에 광해군은 명나라에 지원군을 파견하되 전장에서 상황을 파악하여 움직인다는 전략을 세우고 강홍립에게 명을 내렸다.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은 후금에게 패배했다.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강홍립은 후금의 진영에 명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군대를 파견했다는 전갈을 보내고 투항했다. 후금은 투항한 군사 대부분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강홍립 등 십여 명만 볼모로 잡고 있었다. 

이 시기에 후금에는 조선에서 난을 일으킨 뒤 실패하자 도망친 이괄의 세력들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인조가 삼촌인 광해군을 왕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격동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후금은 1627년 조선을 침략하게 된다. 이 전쟁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전쟁은 두 나라가 형제국의 관계를 맺는 등 몇 가지 화의의 조건에 합의를 하면서 끝나게 됐다. 

하지만 후금은 조선의 국경을 침범해서 약탈을 일삼고, 형제국의 관계가 아니라 군신의 예를 갖추기를 종용하는 등 정묘년 화의의 조건을 깨버렸다. 이에 조선의 조정에서는 북벌을 주장하는 의견이 팽배하게 된다. 

이 시기에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었다. 북벌, 척화의 의지를 알아챈 청태종은 1636년 12월에 조선을 다시 침략하게 된다. 이 전쟁이 병자호란이다. 

청나라는 12만 명의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남한산성에 갇힌 그해 겨울은 길고 길었다. 20만 명의 청군이 둘러싼 남한산성은 고립무원이었다. 

결국 인조는 항복을 하게 된다. 1637년 1월30일 언 땅이 녹기도 전에 인조는 남한산성 서문을 나가 삼전도(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에서 굴욕적인 항복의 의식을 치르게 된다. 

현재 남한산성행궁 담장 옆에는 410년 된 느티나무가 살아 있다. 그 나무는 굴욕적인 항복의 의식을 치르러 나가는 인조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 천흥사 동종 복제품.

남문 동문 방향으로 출발
아픈 역사를 등에 지고 남한산성행궁을 나왔다. 남문으로 향하는 길목에 큰 종이 하나 보인다. 조선시대에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던 천흥사 동종의 복제품이다. 진품 보다 3배 정도 크게 만들었다. 

▲ 남문.

남문에 도착했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남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 남문 밖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몇 그루 있다. 보호수를 보고 다시 남문 안으로 들어와 문루로 올라간다. 문루에서 성 밖을 정면으로 봤을 때 왼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 남한산성 본성 성곽 밖 봉암성 성곽길.

남한산성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성곽길로 걸어야 한다. 성곽길 옆에 숲길도 있지만 숲길로 걸으면 성곽이 보이지 않는다. 

구불거리는 산세에 따라 성곽길도 구불거리며 숲에서 숲으로 이어진다. 그런 길을 따라 걷다가 동문으로 내려가는 길을 만났다. 성곽길은 차가 다니는 도로 때문에 끊어진다. 도로를 건너 동문 앞에 선다.  

동문을 지나 다시 성곽길로 걷다보면 장경사가 나온다. 장경사 절 마당에서 잠깐 쉬었다 간다. 

▲ 남한산성 성곽이 산을 따라 이어진다. 산 높은 곳에 있는 절이 보인다.

장경사를 지나 오르막 계단을 올라가면 장경사신지옹성이 여행자를 기다린다.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곳이 동장대터와 남한산성 여장이다. 군사를 지휘하고 성 안팎을 관측하던 곳을 장대라고 하는데 동장대는 그중 한곳이었다. 지금은 터만 남았다. 여장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에 몸을 숨겨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여장에서 보면 남한산성 본성 밖에 쌓은 외성이 보인다. 성곽길을 따라 북문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벌봉’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외성으로 나가는 암문을 통해 본성 밖으로 나간다. 

▲ 봉암성.

외성의 이름은 봉암성이다. 벌봉(벌바위)을 포함해서 성을 쌓았는데 성의 길이가 2㎞가 조금 넘는다. 

봉암성은 현재 공사중이며 관리가 잘 안 됐다. 허물어진 성벽에 꽃이 피었다. 성터에는 이름 모를 들꽃과 들풀이 들쭉날쭉 자랐다. 풀을 헤치고 외동장대터를 지나 벌봉 앞에 선다. 벌 모양의 닮아 벌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는 하지만 벌을 닮은 것 같지는 않다. 벌봉에서 다시 외동장터를 지나 본성으로 들어가서 북문 방향으로 걷는다. 
 

▲ 남한산성 성곽길.

드디어 남한산성 한 바퀴 
북문에 도착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안에 있던 신료들은 청나라와 화의를 하자는 쪽과 끝까지 항쟁하자는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결국 화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뜻을 들어 항복하게 됐지만 항복하기 전까지 항전의 의지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 암문. 남한산성에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등 4개의 문 이외에 성안팎을 드나드는 작은 암문이 여러 개 있다.

영의정 김류는 북문으로 나가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300명의 군사가 북문으로 나가 싸웠으나 전멸했다.  

북문을 지나 연주봉옹성에 도착했다. 남한산성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이 연주봉옹성이다. 

▲ 연주봉옹성.

연주봉옹성에 올라 잠시 쉬면서 전망을 감상한다. 지나온 성곽길이 산을 따라 이어진다. 하남, 서울 송파 일대가 미세먼지에 가려 뿌옇게 보인다.  

▲ 연주봉옹성에서 본 풍경. 미세먼지 때문에 시정이 좋지 않다. 사진 가운데 희미하게 롯데월드타워가 보인다.

연주봉옹성에서 나와 다시 성곽길을 따라 걷다보면 서문이 나온다. 서문은 한강의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항복한 인조가 서문을 통해 나와 삼전도(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에서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른 뒤 한강을 건너 한양으로 돌아왔다. 

▲ 오래된 성곽에 피어난 꽃.

서문은 현재 공사중이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서문을 뒤로하고 수어장대에 도착했다. 장대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 안팎을 관측하던 곳이다. 남한산성에는 장대가 5개 있었는데 다 없어지고 수어장대 하나만 남았다. 

▲ 무망루라고 적힌 편액. 조선시대 영조가 지은 이름이다.

수어장대 옆에 ‘무망루’라는 편액을 걸어놓은 보호각이 보인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하는 조건 가운데 조선의 세자와 왕자를 볼모로 삼는 조항도 있었다. 소현세자와 그의 동생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8년 동안 볼모로 잡혀있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그가 바로 효종이다. 

북벌을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무망루’라는 이름을 지었다. 원래는 수어장대 2층에 걸려 있었다.  

▲ 수어장대.

수어장대를 지나 남문에 도착했다. 드디어 남한산성을 한 바퀴 다 돌았다. 그리고 남한산성의 사계절을 다 보았다. 화사한 봄, 초록의 여름, 풍성한 가을, 남한산성은 언제나 다 좋지만 누군가 함께 한다면 제일 먼저 겨울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  

잎새 다 진 나무의 앙상한 가지가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있는 치열한 묵언의 생(生)이 그곳에 있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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