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궁남지 연꽃
여행-궁남지 연꽃
  • 장태동
  • 승인 2007.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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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분홍빛이 점점 흐려지면서 꽃잎 끝은 흰색이 되었다. 연못에 피어난 수련이다. 넓은 녹색 잎은 물 위에 꽃을 띄우려는 숙명이라고 쳐도, 작살 같이 내리 꽂히는 햇살을 받아야만 꽃봉오리 터지는 속셈은 아직도 짐작하지 못하겠다. 우리는 지금 부여의 여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무왕이 아들인 의자왕에게 통치권을 넘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 중 하나가 궁의 남쪽에 인공연못과 인공산을 만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도 그가 만들어 놓은 인공연못의 어디쯤 될 것이다.

궁남지, 아직도 당시의 규모를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연못 크기만 1만평~3만평 정도다. 그러나 이것이 그 전체가 아니라 일부라는 것이다. 연못의 이름도 처음에는 큰 연못이라는 뜻의 ‘대지(大池)’였다. 그 규모가 얼마나 했기에 왕이 만든 연못에 다른 이름을 갖다 붙이지 못하고 그저 ‘대지’라 했겠는가.  

어디 규모뿐이겠는가, 삼국사기에 보면 궁 남쪽에 연못을 파고 수로를 만들어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또 물가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었다. 섬은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삼신산을 본떠서 조경을 했다. 규모와 함께 그 풍경의 아름다움도 격을 같이 했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다.

햇볕의 열기가 대지를 녹일 것 같다. 그 열기를 다 받아내고 있는 넓은 연잎 가운데 물방울이 모여 있다. 궁남지의 못물도 다 증발할 것 같은 이 더위에 초록의 연잎 한가운데 맺혀 남아 있는 저 한 방울의 액체는 무엇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연꽃의 바다, 그 위에 떠 있는 하나하나의 연잎에 모두 저 물방울이 있었다. 혹시 생명의 원천이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아닐까? 저것 때문에 작렬하는 태양열 속에서도 저리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시대의 끝을 예견한 무왕의 혼이 후세에 전해져 이곳에 저렇게 많은 환생의 상징, 연꽃을 피어나게 한 것은 아닐까?

여린 꽃잎일지언정 한여름 혹독한 자연을 다 이겨내고 다시 만날 새로운 세상을 약속하듯 연꽃은 저렇게 피어야 한다. 무왕이 보여준 낭만의 절정, 궁남지에서 우리는 여름 부여의 낭만적 카리스마를 느꼈다. 푸른 물이 잔뜩 오른 수양버들의 가지가 연못에 머리채를 드리우고 더위를 식히고 있다. 나무그늘 의자에 앉아 마법 같은 궁남지의 낭만에 푹 빠져든 한 쌍의 남녀, 그들의 시선이 연못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혹시 선화공주의 마음을 얻으려는 백제의 남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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