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경북 봉화 구마동계곡
여행-경북 봉화 구마동계곡
  • 장태동
  • 승인 2007.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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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버린 세상으로

해질녘 계곡은 물이 부풀어 오르고 물소리가 더 커진다. 급해지는 마음 따라 발걸음이 재다. 계곡 건너 저 숲에서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튀어 나올 것만 같다. 세상이 버린 세상으로 우리는 들어가고 있다.

계곡의 밤은 소리로 보고 소리로 느끼고 소리로 모든 것을 직감해야 한다. 민박집 전등불이 있지만 계곡은 칠흑 같이 깜깜하다. 동공을 아무리 열어도 보이는 건 어둠 그 자체뿐이다. 바람은 낮 보다 더 날카롭게 울부짖는다. 우리가 있는 숲과 계곡이 통째로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오즈의 세상’으로 날아갈 것 같았다.

이럴 때면 불 켜진 창들이 아늑하다. 창 안 환한 불빛 아래서 소곤대며 옛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술잔은 계속 돌았고 마음 깊은 곳 비밀의 방 자물쇠를 열고 그 안에 숨겨 두었던 이야기를 하나 둘 씩 꺼내기 시작했다.

스스로 길을 내며 흐르는 물줄기와, 숲을 통째로 흔드는 광풍, 괴기스러운 계곡, 이 모든 것들이 낯선 두려움으로 다가와 편안한 휴식이 됐다. 아무 생각 없이 잠들었다.   

숲을 샅샅이 훑고 내려온 물줄기에 발을 담그고 담배를 문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리라. 나를 괴롭혔던 일들이 남의 일처럼 멀게 느껴진다. 그리고 연기처럼 사라진다.

늦은 아침을 먹고 계곡 상류를 향해 걸었다. 계곡물은 푸르른 숲의 그림자 때문인지, 아니면 시원한 바람을 머금어서인지 청옥빛이 깊었다. 간혹 물결 이 바위에 부서지거나 폭포처럼 퍼붓는 곳에서는 청옥빛이 옅어져서 서늘한 바람이 이는 모시장삼 같았다. 계곡을 따라 걷는 길에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이곳에서는 비조차 지루하지 않았다. 산 깊은 계곡에 비가 내리면 낮에도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난다. 계곡 상류로 가면서 잎 넓은 나무들 사이에 침엽수들이 보인다. 일렬로 서 있거나 무리 지은 침엽수는 그 자체로도 장관이지만 삼각형 구도의 침엽수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면 그 또한 선경이다. 비오는 날 구마동 계곡을 걸으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느낌이 온몸을 휘감아 돈다.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바로 계곡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자주 나온다. 한 여름에도 나무숲이 우거져 햇빛 걱정 할 필요가 없다. 계곡에 몸을 담그고 드러누웠다. 물 건너 바위틈에 이름 모르는 꽃이 피었다. 하늘과 구름이 보였고 내 곁에는 숲과 물이 바람과 함께 머물러 있다. 바람에 꽃줄기가 흔들린다. 나는 꽃을 따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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