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향일암
다시 향일암
  • 나무신문
  • 승인 2016.02.03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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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전남 여수
▲ 향일암 해수관음과 동백꽃.

여수로 가는 기차에 대한 추억
대전역을 출발한 기차가 플랫폼을 막 벗어날 때였다. 어둠 속에서 두 그림자가 날렵하게 기차 안으로 들이닥쳤다. 

정해진 자리가 없는 완행열차는 객실보다 차량과 차량이 이어지는 연결통로에서 더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그들에 의해 사실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기차 계단을 날렵하게 뛰어오른 그들 등 뒤에 생긴 찰나의 진공을 메우기 위해 공기가 이동하는 순간 눅눅하면서도 날카로운 밤바람이 내 뺨을 스쳤다. 그 바람 속에 약간의 알코올 냄새가 섞여 있었다. 

검은색 모직 코트를 입은 남자와 빨간색 오리털잠바를 입은 여자가 그림자의 정체였다. 그들도 우리처럼 젊었다. 

여수로 가는 완행열차는 그렇게 우리들을 싣고 새벽을 뚫고 달렸다. 화장실과 세면대, 차량을 연결한 발판, 그 통로가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이었다. 차량과 차량 사이 공간을 막아 놓은 천막을 제외한 공간은 모두 무쇠덩이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무쇠 위에 페인트를 입혔다. 

우리의 공간은 수증기 가득한 밤공기에 이미 눅눅해져 있었다. 눅눅한 공기 말고도 무쇠덩어리 안으로부터 생긴 산화의 찌꺼기가 진물처럼 끈적거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검은 그림자 남녀의 입에서 내뿜어지는 입김에서 아까 보다 진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어둠 속에서 튀어 나왔을까? 이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을까? 

나는 그들이 궁금했다. 저 멀리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마을은 잠들어있겠지...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기차바퀴 소리만 요란스러웠다.    

▲ 향일암 절집 뒤 바위절벽이 아침햇살을 받아 붉다.

내 인생을 결정지은 열아홉 여행기
그랬다. 열아홉 살과 스무 살 사이 그 겨울에 나는 여수로 가는 완행열차에 있었다. 그것이 나의 공식적인 두 번째 여행이었다. 

열아홉 살 때부터 시작된 나의 여행 이야기를 책으로 엮을 글을 쓰고 있다. 가제목은 <내 인생을 결정지은 열아홉 여행기>다. 아마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열아홉 살부터 시작 된 그 여행들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그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때 여수에 도착한 나와 친구들은 역전 다방에서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동도까지 걸어갔었다. 돌산대교를 건너 몽돌해변을 지나면 향일암이 나온다는 아주 간단하고 허술한 정보(정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만 가진 나는 나만 믿고 나를 따라 온 친구들과 함께 오동도에서 향일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동도에서 향일암까지 30km가 넘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그저 한 두 시간 정도 걸으면 도착하는 거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돌산대교를 지나면서 친구들의 불평이 시작됐다. 과자 몇 봉지와 마른오징어가 새벽부터 오전 9시까지 먹은 음식의 전부였으니 그럴 만도 했었다. 

▲ 향일암이 있는 금오산 정상부. 거북이 모양이다.
▲ 향일암. 바다를 향한 거북이상.

씩씩하게 도로를 걷던 우리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향일암 가는 방법을 물었다. 그때 그 사람 표정은 ‘거기까지는 걸어서 못간단다 얘들아!’가 아니라 ‘니네 어쩌려고 그러냐!’ 였다. 황당하다 못해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분 말을 따라서 우리는 죽포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죽포에서 내려서 임포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종점에서 내렸다. 

▲ 해가 종각에 걸쳤다 .

길은 일정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포장도로 였다. 게다가 종점으로 가는 마지막 구간에서는 길을 넓히고 흙과 돌이 섞인 비포장길을 다지는 작업을 하는 포크레인이 그르릉 씩씩 거리며 분주하게 삽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렵게 도착한 향일암은 순진무구한 암자였다. 암자 마당이 흙이었다. 그곳에 앉아 망망하게 펼쳐진 태평양을 바라보던 친구들의 눈망울이 지금도 기억난다. 

▲ 향일암 일출.

향일암 일출
그리고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2015년 12월에 향일암을 찾았다. 친구와 나는 전남 벌교에서 집으로 가려는 계획을 갑자기 바꾸어 여수로 출발했다. 

어중간한 밤에 도착한 겨울 평일 향일암 상가촌은 한산했다. 이집저집 가격을 흥정하며 여관을 잡고 편의점에서 맥주와 과자 한 봉지를 사서 일출 전야를 보냈다. 

열아홉~스물 그 해 겨울 이후 여수는 많이 왔지만 올 때 마다 날씨가 좋지 않아 향일암 일출을 보지 못했다.

일출 시간 30분 전에 여관을 출발한 친구와 나는 매서운 바닷바람을 안고 계단을 올랐다. 거대한 바위 두 개가 협곡의 절벽처럼 하늘로 솟은 사이로 사람 하나 지나는 길을 만들었다. 이른바 ‘해탈문’이란다. 

▲ 향일암으로 올라가는 길. 해탈문이라고 부르고 있다

‘해탈문’을 지나기 전과 지난 후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삿된 마음이 씻긴 기분이랄까? 
향일암 마당에 서서 해를 기다리는 동안 친구는 법당에 들어가 108배를 한다. 108배가 끝나도록 해는 나오지 않았다. 절을 하느라 얼굴이 붉어진 친구가 내 옆에 선다. 108배가 힘들었었나 보다. 얼굴에 땀이 솟았다. 

일출의 하늘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색을 배경으로 바람도 파도도 살살거리다가 출렁이다가 불어닥치다가 고요해지다가 다시 흔들리다가 잦아들다가... 그러다가 일출 직전에 가장 차가운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 수평선을 뚫고 해의 정수리가 솟아오르고 새들은 그 날의 첫 비행을 시작한다. 

“해다” “야 뜬다 뜬다” 암자 마당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감탄사를 숨기지 못한다. 그야말로 감탄해서 나오는 무의식의 환호다.     

수평선에 허리를 걸친 해 앞으로 작은 고깃배들이 오간다. 해는 점점 떠올라 수평선 위로 온전하게 둥근 불덩이를 드러낸다. 

▲ 관음전 아래 원효스님이 좌선을 했다고 전해지는 바위가 있다.
▲ 풍경.

사람들은 돌아가고 암자 마당에 나 혼자 남았다. 친구도 먼저 내려갔다. 나는 바위절벽에 둥지처럼 안긴 암자 곳곳을 찾아다닌다. 

암자 뒤 바위절벽 길을 지나면 관음전이 나온다. 관음전 아래 바위에 원효스님이 좌선했던 자리를 알리는 팻말이 보인다. 관음전 옆에는 해수관음이 바다를 보고 있다. 그런 해수관음을 바라보는 건 붉은 동백꽃이다. 

▲ 향일암 아침 까치.
▲ 향일암 관음전.

스님들 거처 앞 나무에 까치가 앉아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 암자 뒤 절벽이 아침햇살을 받아 붉게 빛난다. 해가 높아질수록 볕에 날이 선다. 바다에 부서져 난반사 되는 날선 볕들이 눈을 찌른다. 아찔하다. 배가 고파진다. 

이미 도착해 있는 친구의 문자메시지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숙소 옆 편의점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김밥과 라면 누룽지로 아침을 먹는 편의점 통유리 밖으로 태평양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