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가브리엘 G. 마르께스의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 대하여
문화칼럼-가브리엘 G. 마르께스의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 대하여
  • 김도언
  • 승인 2007.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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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개의 독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마르께스를 알게된 것은 나 역시 <백년 동안의 고독>을 통해서이다.

밀교의 비의를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은 가상의 마을 마콘도,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家의, 신성을 보유한 망측하고 기괴한 인물들. 마콘도의 여제사장 같은, 그러나 끝내는 몸이 공처럼 작아져서 숨을 거두는 우르슬라 등 등장인물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삽화는 작중 연금술처럼 현란하고 어지럽기만 하다.

이것이 중남미가 건너온 현대사의 질곡을 상징하는 것임에야, 그 우의의 깊이가 얼마나 도저한 것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는 ‘백년 동안의 고독’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으로 읽힌다.

음습하고 불우한 중남미의 역사를 그 바탕에 깔아놓고 있다는 점에서, 환상적인 서사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극심한 변비를 가지고 있는 권태로운 대령과, 역시 가볍지 않은 천식을 앓고 있는 그의 부인은 매주 금요일에 도착하는 우편연락선을 기다린다.

그런 기다림은 무려 15년 동안 계속된다.

나중에야 드러나는 것이지만 그들이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은 퇴역 군인이 누릴 수 있는 연금증서이다.

그들의 이러한 지루하고 일그러진 기다림(고독)을 극적으로 수식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아구스틴의 어이없는 횡사이다(대령은 어느 술집에서 아들을 살해한 사람과 조우하기도 한다). 무기력한, 두 내외는 투계용 수탉을 키우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소일하면서 표정 없는 조상처럼, 그림자처럼 살아갈 뿐이다.

도태 직전의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연금 증서뿐이다.

이들 내외가 앓고 있는 변비와 천식, 그리고 암울한 고독과 절망은 물론 중남미 역사에 대한 작가의 수사적인 포석으로 읽어야 한다.

퇴역한 ‘대령’의 무기력하고 노쇄한 이미지도 쇠락하고 낙후한 중남미의 세계적 현실을 상징한다.

희망 없는, 혹은 희망에 지친, 일상의 조락이 작품의 전경을 쓸쓸하게 감싸고 있는 바, 이즈음의 밤처럼 잠오지 않는 열대야에 읽을 만한 작품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