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을 보았다
명작을 보았다
  • 서범석 기자
  • 승인 2015.07.2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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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서범석의 칼럼 혹은 잡념

[나무신문] 발레, 지젤(Giselle)을 보았다. 낯간지럽고 상투적이지만 ‘지젤이 내게 왔다’고 표현해야겠다. ‘그것이’ 지젤인지도 모르고 봤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취재차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 왔다. 그곳은 지금 백야가 한참이어서 밤 12시가 다 되도록 해가 지지 않았다. 또 12시가 조금 넘자마자 동녘이 밝아왔다. 해가 졌지만 밝은 밤은 바람도 선선하고 사람도 많아서 다니기도 좋았다.

그 빛나던 밤의 하루, 팔자에도 없는 발레 공연을 본 것이다. 그것도 발레의 본고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말이다. 발레가 공연되는 오페라 극장은 영화에서나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성장을 한 귀부인들이 깃털부채를 낭창낭창하게 흔들던 곳이다.

공연예술이라고 해봐야 대학로에서 연극 몇 편 본 것이 전부였던 나에게는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막이 걷히고 조명이 들어온 무대는 역시 화려했다. 하지만 극의 내용은 평범했다. 시골처녀의 집을 동네 총각들이 번갈아 기웃거리며 추파를 던지는 것으로 발레는 시작됐다. 최진사댁 셋째 딸의 러시아 버전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차이가 있다면 최진사댁 셋째 딸 마음은 칠복이 놈이 가져갔지만, 지젤의 마음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바람둥이가 훔쳤다는 정도다. 극은 그렇게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흘렀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방심은 곧 심각한 충격에 휩싸여야 했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며 지젤의 죽음으로 1막이 끝났을 때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전율이 내 몸을 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장막이 내려와 있었다.

‘막간’을 이용해 부랴부랴 일행에게 묻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말로만 듣던 지젤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용 또한 최진사댁 셋째 딸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보다 먼저 봐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 게 화제작이고, 보고 또 보고 보면 볼수록 오래된 감동이 새로워지는 게 명작이라고 나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명작은, 명작 그대로가 명작이었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나무는 나무 그대로가 나무이고, 그것 자체로 명작이다. 나무가 쇠처럼 단단하고 플라스틱처럼 매끄럽고 썩지 않아서 명품인 게 아니라, 옹이 있고 갈라지고 터지고 휘어지고 거칠고 낡기 때문에 명작이라는 말이다. 

PVC 같은 목재가 소비자들에게 주는 신선한 충격은 잠깐일 뿐이다. 나무가 나무일 때 소비자들은 비로소 쓰고 또 쓰고 쓰면 쓸수록 감동이 새로워지는 명작으로서의 목재라는 가치를,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