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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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신문
  • 승인 2015.07.1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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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
▲ 여미리 유기방 가옥 사랑채.

서울 남부버스터미널에서 운산 행 버스표를 끊었다. 첫차를 타려고 했으나 시간이 안 맞아 다음 차를 타야했다. 새벽에 나오는 바람에 아침을 못 먹어서 식당을 찾는 데 문을 연 곳이 없다. 터미널 주변을 헤매다 문을 연 고기집을 찾았다. 아침 장사를 하려는 게 아니라 새벽 장사가 날 샐 때까지 이어진 듯한 분위기다. 식당 사정은 묻지 않고 그저 아침밥만 챙겨 먹고 나왔다. 

 

운산, 소읍 풍경
운산은 서산시에 속한 면소재지다. 시골 면소재지 풍경이 다 비슷하겠지만 각 지역마다 다른 풍경 한 두 개 쯤은 있기 마련이다. 

아침 9시가 채 안 돼 운산면 ‘차부’에 도착했다. ‘차부’란 경상도 강원도 충청북도 일부 지방에서 사용하던 사투리이자 시골에서 터미널 없이 버스 한 대 잠깐 머무를 수 있는 공간에 마련된 버스매표소 겸 승하차장을 말한다. 

목적지인 여미리 행 시내버스는 있는 지, 버스가 없으면 택시는 있는 지 등을 알아보기 위해 면소재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 길에서 눈에 띄는 분식집을 보았다. 회벽에 하얀색 페인트를 칠한 1층 집이다. 알루미늄새시로 만든 미닫이 출입문에 노란색 비닐을 붙여 바탕을 마련하고 그 위에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글씨를 오려 붙였다. 간판에 적힌 이름 또한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 운산면 소재지 분식집. 건물 외관을 보면 이 집에서 만드는 건 뭐든지 다 맛있을 것 같다.

잔치국수, 비빔국수, 칼국수, 콩국수, 냉면 등을 판다고 붙여놨는데 외관에서 느끼는 기분이 이 집에서는 뭘 먹어도 맛이 있을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을 먹지 말 것을...

그 다음 눈에 들어온 건 차부 옆에 있는 큰 나무였다. 나무가 커서 보호수로 지정된 줄 알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안내판은 없다. 다만 나무 그늘 아래 의자가 여러 개 놓여있다. 마을 사람들이 매미소리 들으며 한 낮 더위를 피하는 곳이겠거니 생각했다. 오가는 사람 누구라도 앉게 해 준 배려라고 생각하고 앉았다. 

▲ 운산면 소재지 큰 나무. 보호수로 지정되지 않았다. 나무 그늘 아래 의자가 놓여 있는 걸로 봐서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정자나무 같다.

아침에 동네 나무 그늘 아래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이 마을에 처음 온 것 같지 않고 오랫동안 여기서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택시를 타려고 했는데 택시가 없다. 조금 전에 보았던 분식집 아줌마에게 물어봤더니 택시는 없고 택시처럼 운행하는 자가용이 있단다. 버스가 닿지 않는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 여미리 유기방 가옥.

아름다운 간섭
택시비는 거리에 비례한다. 최소 금액이 5000원이다. 운산면 여미리에 도착했다. 여미리에는 오래된 집 두 채와 오래된 나무 두 그루, 돌을 깎아 만든 오래된 돌부처가 하나 있다. 

▲ 여미리 유기방 가옥 안채 대청마루.

처음 들른 곳은 ‘유기방 가옥(충청남도 민속자료 제23호)’이다. 서산지역 전통 양반가옥이다. 집은 크게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는데 안채와 사랑채는 담으로 구분됐으며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다.

▲ 여미리 유기방 가옥 안채와 사랑채를 드나드는 문.

이곳에서는 민박도 하고 음식도 먹을 수 있다. 주인아줌마는 여름에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콩국수를 추천한다.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기도 하고, 가마솥 걸린 부엌을 기웃거리다가 사랑채로 옮겨 옛날에 여기에서 살던 이집 바깥주인의 눈길이 어디어디 박혔는지도 가늠해본다. 

▲ 330년 된 여미리 비자나무. 보호수다.

집을 나서서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330여 년 전에 제주도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비자나무를 볼 수 있다. 이 나무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4호다.

비자나무에서 가까운 곳에 조선시대 두 번째 임금인 정종의 네 번째 아들 선성군의 신위를 모신 선정묘가 있다. 

▲ 여미리 선정묘.

선정묘를 지나 ‘여미리 석불입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과 300년 된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수수한 모습으로 서 있는 돌부처가 부처 같지 않고 장승 같거나 옆집에 사는 아저씨를 닮았다. 불상 뒤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가 돌부처를 보호하는 것 같다. 

▲ 여미리 유상묵 가옥.

석불입상을 뒤로하고 조금 더 걸으면 ‘유상묵 가옥(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22호)’이 나온다. 이 집 또한 이 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이다. 

▲ 여미리 유상묵 가옥 빗물통이 새 형상이다.

집 구석구석 살펴보다가 뒤뜰에 섰다. 산기슭 비탈진 곳에 둥그런 원호를 그리며 담장을 만들었다. 산은 그 일부를 양보하고 사람은 최대한 산을 해치지 않으며 집을 그 안에 들였으니 이 보다 아름다운 간섭이 어디 있겠는가!

 

시골 면소재지에 있는 오래됐지만 단정한 분식집을 만난 그 아침의 신선한 기분이 사람들에게 그늘을 내어주는 차부 옆 큰 나무로 전해지고, 300년도 더 된 오래된 나무와 돌멩이로 만든 부처를 만나 부풀다가, 품을 내어준 자연과 그 안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오래된 집 뒷마당에서 산처럼 푸르러진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