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海印寺
해인사 海印寺
  • 나무신문
  • 승인 2014.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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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30 - 한국의 사찰 ⑥

 

▲ 원만한 형태를 띤 장판각 출입구

입지
해인사를 두고 있는 가야산(1430)은 신령스러운 산으로 다가온다. 예로부터 조선 8경의 하나로 꼽혔으며, 주봉인 상왕봉을 중심으로 톱날 같은 암봉인 두리봉, 남산, 비계산, 북두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마치 병풍을 친 듯 이어져 있다. 해인사는 그 가야산의 품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특별함을 지닌다. 가야산의 이름은 이 산이 옛날 가야국이 있던 이 지역에서 가장 높고 훌륭한, 가야의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기암괴석의 봉우리와 시원한 계곡, 그리고 붉은 소나무 숲은 다른 산에서 보기 힘든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가야산은 백두대간의 지맥으로 분류되지만 독립된 산세로서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수도산과 함께 백두대간의 지세 흐름이 이어지는 측면이 있지만 이 산의 형세나 의미상으로는 거대한 산군가운데 홀로 우뚝 선 느낌이 강하다. 가야산(1430m)줄기를 본맥으로 매화산(954.1m)과 거창군계의 비계산(1125.7m), 두무산(1083.4m), 오도산(1133.7m) 그리고 산청군계의 황매산(1108m) 등 큰 산이 주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악견산, 금성산, 허굴산, 의룡산과 북부의 가점산, 미숭산, 두무산 남쪽 군계의 자굴산, 미타산 등의 준봉과 높고 낮은 산맥이 첩첩으로 이어져 있다.

 

 

▲ 장판각에서 본 해인사 일우

가야산이 소재한 합천은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속하였으며 부족 국가로는 다라국이 있었다. 대병면, 야로면, 삼가면 등지의 많은 고분과 쌍책면 성산리 옥전고분군은 강력한 지배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그 후 신라 24대 진흥왕 23년(562) 신라 이사부와 이다함에 의한 대가야국 멸망으로 합천지방이 신라에 귀속되었다.

 

합천은 동쪽으로 성주, 고령, 북쪽으로 김천, 서측으로 무주, 거창, 남쪽으로 의령과 접해 있다. 대야성전투’로 유명한 대야성이 있던 이곳은 백제에서 경주로 가기 위해 또는 신라에서 백제의 수도인 부여로 가기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으로서 두 나라 모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합천은 좁은 내라는 뜻으로 이 지역이 산이 많고 들판은 없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계곡이 많다는 뜻과 부합되는 것으로 풀이 되는데 1914년 3월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분지를 이루고 있는 초계와 삼가가 합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좁은 계곡 또는 좁은 내라는 뜻은 맞지 않다하여 (세 개의 고을이 합하여 이루어진 곳)합천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한문식(漢文式) 표기방식은 그대로 존속하나 말할 때와 읽을 때는 “합천”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 장판각 외부마당

연혁
해인사는 화엄십찰의 하나로 세계기록유산인 대장경판과 세계문화유산인 장경판전을 비롯해 반야사원경왕사비, 석조여래입상, 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 합천 치인리마애불입상 등 국보와 보물을 비롯한 유물 70여점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사찰이다. 통일신라때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에 중창한 사찰이다.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순응 화상과 이정 화상이 신라 애장왕비의 등창을 치료해 주자, 왕이 감동하여 가야산에서 정사를 보면서 해인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 태조 때에 이르러서는 해인사를 국찰로 삼으면서 사람들에게 명찰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임진왜란과 화재 등으로 거듭 중수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장경판전은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지어진 후, 여러 차례 중수가 이루어졌고 대적광전, 응진전, 퇴설당, 해탈문 등은 대부분 1817년 이후에 지어진 건물들이다.

 

 

▲ 해탈문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어서 법보사찰이라고 불린다. 팔만재장경이 해인사에 보관된 것은 조선 정종 원년 때의 일이다. 1398년 대장경판이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이전되면서 법보사찰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균여 대사와 대각 국사 같은 대승고덕도 다수 배출되었다.

 

절의 이름은〈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되었고, 해인사의 개조(開祖)였던 순응 역시 의상의 손제자였다는 사실 등에서 화엄사상(華嚴思想)을 근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인삼매(海印三昧)’란 석가가 ‘화엄경’을 말할 때 들어간 선정(禪定)의 이름, 태양에 모든 사물이 골고루 깊이 투영되는 듯한 마음의 고요함을 뜻한다. 번뇌가 끊어진 부처의 마음 가운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법이 뚜렷이 나타났다고 하여 일컫는다.

 

 

▲ 해인사 구광루

배치 및 공간구조
해인사는 도량 배치는 전체적으로 배가 떠가는 행주형 형국으로 불린다. 해인사가 자리 잡은 터는 가야산의 주봉이 병풍처럼 둘러친 가운데 그 안쪽에 모인 물인 길게 홍류동 계곡으로 흘러가는데 해인사의 명칭은 그러한 입지 형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홍류동 계곡을 따라 난 길을 거슬러 올라서면 나지막이 경사진 터에 경내의 진입을 알리는 일주문이 서 있다. 그 곳을 지나 숲길을 조금 들어서면 천왕문이 나오고 더 나아가면 해탈문이 나오는데 사찰에서 해탈문은 불이문이라고도 하며 속계와 불계가 둘이 아니라는 의미로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섰음을 나타낸다. 그 안쪽으로는 경사지형에 건물이 들어설 터를 평평하게 닦으며 점차 높아지는 몇 개의 영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먼저 해탈문 안쪽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구광루가 있고 그 뒤로 오르면 너른 반듯하게 조성된 마당 뒤로 주불전인 대적광전이 웅장하게 올려 보인다. 대적광전은 사찰 구성상 해인사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건물이다. 일주문에서부터 그 곳까지의 각 영역들은 화엄경에 나타난 불교적 세계관의 위계가 부여 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각각의 의미상의 위계에 걸맞은 건물들을 중심 마당과 연계해 배치해 놓았다. 대적광전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이 봉안 되어 있는데 화엄 사찰들은 대부분 그 부처를 주불로 봉안한다.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은 법보사찰로서의 상징성을 갖는다. 그러한 대장경판의 의미와 보존 환경을 고려해 대장경판을 보관한 장판각을 대적광전 후면에 별도 영역으로 조성하였다.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다.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