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景福宮
경복궁 景福宮
  • 나무신문
  • 승인 2014.06.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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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15 - 한국의 궁궐 1/5

 

▲ 근정전 내부

입지
조선 개창 후 태조는 즉위하면서부터 바로 천도를 명하고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리고 새 수도 후보지로 거론된 계룡산을 비롯하여 지금의 신촌 일대인 무악, 그리고 백악산 아래의 한양을 직접 나서서 둘러보았다. 그러나 한양 천도와 궁궐 터 선정을 놓고 당시의 핵심 관료들 가운데서도 의견이 분분해 한양(漢陽)을 새 도읍지로 결정하기까지는 많은 논란을 거치게 되었다. 하륜 같은 이는 계롱산이나 한양을 모두 반대하고 오로지 무악을 고집한 반면 조준과 권중화 등은 무악을 한사코 반대하였다. 또한 풍수를 업으로 삼는 서운 관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천도를 추진하고 새 도읍을 선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태조 자신이었다.

 

조선이 한양을 도읍지로 삼은 이유는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췄기 때문이었다. 한양은 풍수지리상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의 정기가 한북정맥을 타고 북한산을 통해 흘러든 백악을 주산으로 하고 좌우에 놓인 낙산과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목멱산(남산)이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사신사를 갖춘 혈자리에 해당하고, 동에서 서로 휘돌아가는 한강이 크게 감싸 흐르고 있어 최상의 길지로 꼽힌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그 지세의 중심에 해당하는 백악 정면 기슭에 정궁인 경복궁을 지었다. 경복궁의 터는 원래 고려 숙종(肅宗 1096~1105) 때 조영된 남경의 이궁지(離宮址)로서  고려 때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지로 지목된 곳이다. 그 터가 협소하여 조금 남으로 옮겨 넓은 곳에 조선의 정궁을 건립하였다. 

 

 

▲ 자경전

연혁
1394년(태조3년) 8월13일 태조가 스스로 무악을 살펴보러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옛 고려의 남경이었던 한양의 옛 행궁에 머물면서 그 곳을 도읍으로 내정하였다. 그리고 8월24일 도평의사사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기를 공식적으로 요청한 다음 9월1일에 새 도읍과 궁궐을 짓는 일을 맡을 기구를 설치하고, 심덕부(沈德符) 등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9월9일에는 정도전(鄭道傳), 심덕부 등 조정의 핵심 인물들이 한양에 가서 종묘사직의 터를 정하였는데, 이로서 새 도읍을 짓는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공사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은 10월25일에 태조를 비롯한 조정 일행이 개경을 출발하여, 10월28일에 한양에 도착함으로서 한양 천도가 단행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궁궐 공사는 착수도 되지 않은 상태여서 태조는 한양부의 객사(客舍)를 이궁으로 삼아 임어하였다. 종묘와 궁궐 공사는 12월4일에 가서야 착공하였고, 공사 시작 10개월 만인, 1395년(태조4년) 9월29일에 완공되었다.

 

 

▲ 근정전 일우

태조가 창건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소박한 규모였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서는 그 당시 경복궁의 규모에 대하여 총 390여간이고 그 중 근정전 일곽은 남북이 길고 동서축이 짧은 직사각형 터전에 조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대원군이 중건한 근정전 일곽에 대하여 적고 있는 「궁궐지(宮闕志)」의 기록을 보면 고종때의 경복궁은 태조 때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구역 내에 중건하긴 하였지만, 행각(行閣)이 복랑(復廊)으로 태조 때의  단랑(單廊)과 다르며, 태조 때의 천랑(穿廊)이 고종 때는 거론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궁궐내의 다른 부분에서도 볼 수 있다. 즉 고종 때의 중건은 옛 궁궐에 따라 중건하긴 하였으되 단순히 옛 궁궐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궁궐의 위엄을 갖추려는 의지에 따라 규모의 증감과 변형도 감행하였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경복궁의 모습이 곧 태조 때의 모습을 재현해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 교태전 일우

배치 및 구성
경복궁의 배치는 한양 지세의 골격을 이루는 사사산의 중심에 조성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경복궁 후면의 백악은 관념적으로 사사산에 둘러싸인 지세의 중심에 해당한다. 하지만 실제상으로는 인왕산 쪽으로 치우쳐 있다. 한양 도성의 지형은 서쪽은 안산 등의 산세가 높고 동쪽은 평지와 연결되어 있다.

 

경복궁은 한양의 지리상 중심인 백악을 배산으로 삼고  중국의 궁궐 조영 원리를 설정한 주례고공기의 규범에 따라 평지에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정문·중문·정전·편전· 침전으로 이어지는 정연한 축선을 갖도록 하여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데 이는 정궁으로서 갖는 상징성과 품격을 고려한 배치로 보인다. 즉 축선에 맞추어 질서정연한 배치 구조를 갖춤으로서 새 왕조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여진다. 경복궁은 창덕궁이나 창경궁에 비해 비교적 평지에 가까운 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 그처럼 도식적 규범성을 갖출 수 있었다.

 

 

 

▲ 광화문

경복궁의 수난과 변천
경복궁에 살고 있던 태조 7년(1308)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태조는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정종은 왕이 되자 한양을 떠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그 후 제3대 왕으로 즉위한 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를 강력하게 추진해 지금의 창덕궁인 새 궁궐을 짓고 그 곳에 임어(臨御)하였다. 그리고 그로써 법궁 경복궁, 이궁 창덕궁의 법궁-이궁 양궐체재가 마련되었는데 태종이 창덕궁에 머울러 경복궁은 빈 궁궐로 남게 되었다.

 

 

경복궁은 그 후 중종 38년(1543) 동궁이 불탔고 이어 명종 8년(1553) 9월에는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강녕전, 흠경각 등 대내가 소실된 것을  명종 9년에 중건하였다. 그리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그 이후 270여 년이 지나도록 방치되어 있다가 고종 2년(1865) 중건을 시작했고 1868년(고종 5)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에 화재로 자경전이 불타서 고종 13년 교태전, 자경전을 중건했고 자미당(紫薇堂), 인지당을 改修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 다시 큰 불이 나서 내전 830여칸이 소실되었던 것을 1888년 (고종25)년 중건함으로써 내전의 격식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 경희루

고종때 복원된 경복궁은 그 후 1895년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된 후 고종이 경운궁으로 이어하여 28년밖에 사용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여러 가지 사건 때문에 경복궁은 정궁이면서도 조선왕조 전 기간(519년)의 반도 못되는 226년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들어 조선 정궁의 면모가 완전히 피폐화되었다. 일제는 1918년 창덕궁 대내(大內)를 중건한다는 명목으로 200여 동에 달하던 많은 전각들을 이건했거나 훼철하였으며, 이후 조선총독부(朝鮮總督部) 청사와 공진회, 박물관 등을 짓기 위해 주요 전각들을 헐어냄으로써 경복궁의 모습은 완전히 훼손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광복이 될 때까지 궁내에 남아있는 건물은 몇 개의 전각 정도뿐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國立中央博物館의 전시장으로 대규모의 건물을 궁 동편에 지었다. 그 후 도로의 확장 등으로 궁성이 여러 번 퇴축(退築)되는 과정에서 동십자각(東十字閣)은 도로 가운데 나앉게 되고 서십자각은 훼철되었다. 그처럼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은 많은 사연과 상처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그 같은 경복궁의 훼철은 곧 조선의 아픔으로 다가온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1 / 사적 제 117호

▲ 향원정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