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같은 처음을 만나는
새벽 같은 처음을 만나는
  • 나무신문
  • 승인 2013.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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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강원도 화천 비수구미와 파로호

▲ 파로호
화천의 오지 비수구미와 파로호 유람선 여행의 공통점은 물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비수구미를 감싼 숲 계곡을 흐르는 물은 신선한 새벽 같다. 새벽 같은 물이 흘러들어 이루어진 파로호에 떠 있으면 물이 흘러온 길을 거슬러 막 동이 튼 동쪽 하늘로 오르는 감흥이 인다.  

 

화천의 깊은 밤
어제 저녁은 잡고기와 메기를 넣고 끓인 잡고기메기매운탕이었다. 보랏빛 저녁 공기가 수면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파로호 옆 식당은 매운탕을 먹기에 딱 좋은 분위기였다.

반주를 곁들인 매운탕 저녁상은 자칫 잘못하면 긴 술자리로 이어지기 쉬운데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함께 한 하루를 돌아보는 정리의 장이었기 때문에 늘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밥상을 물린 뒤에도 남아 있는 매운탕의 여운 때문인지 함께한 몇몇 사람이 화천 읍내에서 본격적으로 통해보자는 뜻을 비쳤고 우리는 흔쾌히 동의 했다.

약속 장소는 수수한 실비집이었다. 화천의 막걸리를 먹어봐야 한다며 빈 막걸리 주전자를 들어 주모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늦게 합류한 우리에게 환영의 인사를 보낸다. 우리는 한 잔 가득 따른 막걸리를 한 숨에 들이켜는 것으로 화답했다.

▲ 해산령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로호 상류 물줄기
밤이 깊어지도록 술자리는 끝나지 않았다. 통음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침부터 움직여야 하는 일정 때문에 깊은 밤과 이른 새벽 사이 어디쯤에 시간을 묶어 두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만나기로 한 사람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한 시간은 더 지나 일어났을 텐데… 

허겁지겁 나간 식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어죽탕이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뚝배기 어죽탕으로 해장을 한다. 매운탕 저녁에 이은 아침 어죽탕이라니! 물이 많으니 물고기가 많고 물고기로 만든 요리가 많겠지만 아침 어죽탕은 생각해보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맛있다. 해장의 효과도 곧바로 나타난다. 화천의 깊은 밤을 막걸리 주전자에 풀어 통째로 마신 술기운이 몸속 깊은 곳부터 ‘훅’하고 솟구치더니 땀이 주르륵 흐른다. 코끝에서 향긋한 술 향이 퍼지는 것으로 화천의 밤은 이제야 지난 시간이 된 것이다.  

▲ 비수구미 산책길 숲에 떨어진 물든 낙엽
파로호에서 낙엽처럼 떠다니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 있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거울 같은 호수의 수면을 깨뜨리고 배가 지나간다.

배가 가는 속도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린다. 통쾌하다. 객토의 그것처럼 물을 뒤엎고 지나가는 선체 주변으로 포말이 일어 물도 깊은 숨을 쉬나보다. 물의 숨결이 나의 호흡과 하나가 된다. 물 위에 떠가는 건지 하늘을 나는 건지 아주 잠깐 동안 아찔해진다.
 

파로호 유람선인 물빛누리호는 일정 인원 이상이 모여야지 운항을 한다. 운항 시간도 정해져 있고 월요일과 화요일은 아예 운항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물빛누리호를 이용하지 못하게 됐다. 정해진 시간에 파로호와 비수구미를 취재해야 하는 일정 때문에 협조를 얻어 행정선을 타게 된 것이다.

행정선은 작은 모터보트다. 100여 명이 탈 수 있는 물빛누리호라면 그렇게 빨리 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배가 다람쥐섬 앞을 지나간다. 다람쥐처럼 작은 섬이다. 멀리 산 능선이 구름에 가린 풍경을 보는 순간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해산령! 화천으로 오기 전에 보았던 사진 한 장. 넘실대는 산줄기의 품에 안긴 하얀 구름들, 운해를 봤어야 했다. 해산령 전망대에서 구름이 바다가 되고 산봉우리가 섬이 되는 풍경을 굽어 봤어야 했다.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구름 낀 산을 올려 보며 앉아 있는 배가 가볍게 느껴진다. 파로호에 떠 있는 낙엽 같다. 망망한 운해의 풍경을 놓친 마음이 낙엽 같다. 

▲ 맑고 깨끗한 비수구미 계곡물
비수구미
비수구미 선착장에서 우리를 먼저 반기는 건 신선한 공기였다. 단풍의 색을 그대로 간직한 채 땅에 떨어져 깔린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 해산령 운해의 풍경을 놓친 낙엽 같은 마음을 비수구미 풍경이 위로해준다.

계곡 옆으로 흙길이 잘 났지만 낙엽 쌓인 길 없는 길로 걷는다. 그동안 쌓인 가을이 몇 해인지… 낙엽에 발이 빠진다. 맑아서 시린 계곡물로 얼굴을 씻는다.

길은 산 위로 이어졌다. 그 길을 따라가면 해산령 고갯길 포장도로에 다다를 수 있단다. 길은 어디로든 이어지겠지만 그 길을 어디까지 따라가야 하는 지 결정하는 건 여행자의 몫이다.

흙길과 낙엽길, 계곡을 드나들며 게으르게 걷거나 멈춘다. 그리고 또 어슬렁거리며 돌멩이도 만져보고 붉게 물든 단풍 그늘에 앉아도 본다. 한 줌 햇살을 두 손 모아 받는다. 햇살과 함께 물소리도 고이고 바람도 불어간다. 

물과 숲이 그 마을의 전부다. 숨 쉬는 게 행복하다는 걸 느낀다. 숨 쉰다는 게 살아 있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숨 쉬는 그 자체를 말하는 거다. 평소와 같이 숨을 쉬어야 하는 데 숨 쉬는 것에도 욕심이 생긴다. 숨을 더 많이 깊게 쉬고 싶어지게 한다. 숨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비수구미 계곡길에서 느낀다.
 

▲ 비수구미 나물비빔밥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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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