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핀우린 식물원
미얀마 핀우린 식물원
  • 나무신문
  • 승인 2012.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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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원이 열어주는 세계의 역사<46>

 

▲ 붉은 색 꽃이 유난히 많은 미얀마 핀우린 식물원 .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아웅산 수치 여사로 더 알려진 미얀마(과거 이름은 버마)를 필자가 처음 방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91년 9월이다.

수도 양곤(과거 이름은 랑군)의 국제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마치고 조그만 공항청사를 나와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갈 때 이용하였던 택시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승용차 형태의 택시가 아니라 조그만 픽업 트럭이었다. 승객은 한 명만이 좌석에 앉을 수 있었으므로 필자는 운전기사 옆에 앉았고 필자와 함께 동행하였던 젊은 직원은 짐칸에 앉아서 시내에 있는 호텔까지 갔다. 당시 양곤 시내에는 승용차 형태의 택시는 없고 모든 택시는 오래된 픽업트럭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필자가 중학교 1학년이던 1966년에 우리나라 기아자동차에서 조립한(원래 모델은, Mazda 상표를 가진 일본 동양공업사 제품) 소형 3륜 픽업트럭(적재량 0.5톤)도 있었다. 그 삼륜차는 1966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용달차로 사용되다가 몇 년이 지난 뒤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삼륜차를 25년이 지나 양곤 시내에서 보게 된 것은 큰 놀라움이었으나 25년 정도 된 차는 이 나라에서 신형차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시내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이 사용하던 군용트럭(약 50년 사용)이 버스나 화물트럭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서 부품은 어떻게 구하는지 호기심이 발동하였다(미얀마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중  영국군이 일본군과 3년이 넘는 기간을 싸웠다). 시간이 정지한 나라가 아니고 시간이 뒤로 한참 달려간 나라에 온 것이었다. 필자가 미얀마를 방문하였을 당시 미얀마의 군사정권은 외국인의 방문을 환영하지 않아 미얀마를 3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외국인은 극히 제한된 지역만 방문할 수 있었다. 즉, 백색지역은 양곤, 만달래이 등 외국인이 방문할 수 있는 곳이고 황색지역은 외국인은 방문하지 못하나 자국인은 방문할 수 있는 곳이고, 흑색지역은 자국인 조차 특별한 허가 없이는 방문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양곤, 만달래이 등 제한된 지역만 방문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양곤 시내에는 ‘우리를 반대하는 자는 반역자이다’라는 큰 글씨의 구호가 시내 여기저기에 걸려 있었다. 독재 군사정권이 국민의 불만을 억압하고 일당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당시 정부 각 부서의 장관을 포함한 수장들은 모두 군인 장성들이었다.  군사정권에 의해 오랜 기간 가택 연금을 당하던 아웅산 수치 여사가 2012년 3월에 치러진 보궐 선거에 당선 된 것을 보면서 이제 이 나라에도 민주주의의 서광이 비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미얀마 항공사의 40인승 F27 Fokker 쌍발 프로펠러 여객기를 타고 양곤을 떠나 이 나라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만달래이로 갔다. 이라와디강 동편에 자리잡은 고색 창연한 이 도시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 우리는 미얀마 산림청에서 내 준 일본 마즈다회사의 4륜 구동 짚차를 타고서 만달래이에서 동쪽으로 70km 떨어진 핀우린(Pyin Oo Lwin)으로 향하였다. 만달래이를 벗어나자 짚차는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산악지대로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샨(Shan) 고원(高原)이 시작하는 것이다. 미얀마의 동부지역을 넓게 점유하고 있는 샨 고원은 평균 높이 1000m로서 말레이 반도 북부에까지 넓게 펴져있다.

만달래이에서 핀우린으로 가는 길은 제2차 세계대전중 인도북부와 중국 남부의 곤명(昆明)을 연결하는 연합군의 육상 수송도로를 연상시킨다(미군은 1100km 가 넘는 이 군사 도로를 이용하여, 일본군에 대항하고 있던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군대에 연료와 무기 등 군수물자를 보냈다). 즉 산을 굽이 굽이 돌아서 올라가는 산길이다. 그래서 만달래이와 핀우린 사이의 거리는 70km 밖에 되지 않지만 차량으로 거의 3시간이 걸린다. 굽은 길이 워낙 길어서 도로의 굽은 모습이 카메라에 다 담기지 않는다. 이렇게 핀우린은 고산지대에 있는 휴양 도시로서 영국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 놓은 건물들이 푸른 수목에 싸여있다. 날씨가 더운 양곤을 피해 영국 식민지 관리들은 날씨가 서늘한 이곳에 와서 휴가를 보냈으므로 도시에는 영국식 잔재가 아직까지도 여기저기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이 도시에 ‘작은 런던(Little London)’ 이라는 별명을 주었다. 고색창연한 담쟁이 덩굴이 벽을 덮고 있는 대저택은 영국인이 떠난 뒤에는 미얀마 공무원들의 저택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비록 봉급은 적지만 주택만은 누구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식민지 시절에 이 도시는 매이묘(Maymyo)라고 불렀으나 독립후 미얀마 군사정권은, 꽃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를 핀우린(뜻; 꽃의 王都)이란 이름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매이묘’라는 옛이름을 더 정겹게 사용하는 것 같다. 

식물원은 도시에서 가까운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중 영국군은 유럽전선에서 생포한 터키군 병사들은 이곳까지 끌려와서 강제 노역을 시켜서 식물원을 만들었다. 1915년부터 2년 동안 전쟁포로들은 97Ha(32만평)크기의 식물원을 만들고 (각종 수목과 화초를 심고) 식물원 안에는 면적 26Ha(8만 6천평)의 거대한 인공 호수도 만들었다. 호수에는 식민지 시절 영국인 총독의 이름을 따라서 할콧 버틀러(Harcourt Butler)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렇게 포로들의 노동으로 조성된 식물원은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17년에 일단 틀이 완성되었고 그 뒤에도 아름다운 조경을 조성하여 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난 1920년에 정식으로 개원(開園)하였다.

필자가 9월11일, 식물원을 방문할 때, 미리 연락을 받은 식물원장이 입구에 나와서 필자 일행을 마중하여 준다. 원장은 검은 색으로 염색한 군용 야전잠바를 입고 있었다. 워낙 공무원 봉급이 적으므로 좋은 옷을 사 입는 것이 부담이 된 것 같다. 필자도 대학교 1학년일 때 동대문 시장에서 검은색으로 염색한 군용 야전잠바를 사서 입고 다녔으므로 원장의 옷차림이 더욱 친밀하게 느껴진다.  

오늘날 이 식물원 속에는 천연림 20Ha(6만6천평)가 자리잡고 있으며, 식재한 수목은 열대, 온대의 수종 344종, 5천 그루가 넘는다. 이외에도 42종의 난(蘭), 25종의 장미, 6종의 야생백합화를 포함하여 수많은 화초가 자라고 있다. 우리에게는 크루엔(Kruen) 또는 아피통(Apitong)으로 알려져 있는 이우시과(二羽枾科 ; Dipterocarpaceae)의 Dipterocarpus 속(屬) 의 여러 수종(이를 현지에서는 Kanyin 이라고 부른다)이 핀우린 지역을 포함한 미얀마 북부 지역에도 많이 생육하고 있는데, 이 식물원의 천연림 안에서도 열대 지역의 다른 수목과 함께 어울려서 여기 저기 보인다.

핀우린 시내에서는 화려한 꽃도 많고, 불교의 나라답게 연꽃도 많다. 이런 연유인지 식물원 안에는 특히 많은 종류의 화려한 꽃들이 많이 식재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붉은 색 꽃이 더욱 화사하게 눈에 들어온다.

핀우린 시내에서 조랑말이 끄는 마차는 서민들의 중요한 대중 교통수단이다. 그런데 이 조랑말 마차를 핀우린 식물원 경내에서도 볼 수 있다. 식물원이 너무 크므로 이 마차를 타고서 샨 고원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식물원을 둘러 보는 것은 다른 식물원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권주혁.

동원산업 상임고문·강원대 산림환경대학교 초빙교수.
서울대 농대 임산가공학과를 졸업했다. 1978년 이건산업에 입사해 이건산업(솔로몬사업부문) 사장을 역임했다. 파푸아뉴기니 열대 산림대학을 수료했으며, 대규모 조림에 대한 공로로 솔로몬군도 십자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권주혁의 실용 수입목재 가이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