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캐입타운의 회사정원 식물원
남아공, 캐입타운의 회사정원 식물원
  • 나무신문
  • 승인 2010.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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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세계의 식물원-권주혁 이건산업 고문·강원대 산림환경대 초빙교수

 

▲ 식물원 입구(1911년에 만든 석조 대문)

요즘 지구촌이 월드컵 열기로 후끈거린다. 육대륙에 흩어져 있는 식물원들 가운데, 좀 늦은 감이 있으나  월드컵에 발맞추어 우리도 월드컵 개최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가보자.

남아프리카는 뛰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어 여러 곳에 좋은 식물원을 갖고 있다. 그 가운데 캐입타운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립 컬스텐보쉬(Kirstenbosch)식물원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식물원을 세계 10대 식물원의 한곳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식물원을 소개하기에 앞서 캐입타운 시내 한 가운데 있는 컴패니가든(회사정원) 식물원이라는 식물원을 소개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식물원을 통해 남아프리카 남부지역의 역사를 보다 넓고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캐입타운은 정말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다. 필자는 약 90개국을 다니면서 이렇게 매력있는 도시를 아직까지는  만나볼 수  없었다.  이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는  3,4일 정도 머물려고 계획하였으나 며칠 사이에 너무 마음을 빼앗겨서 1주일을 보낸 도시이다.

이곳은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에 속해있어 일년 내내 좋은 날씨가 계속된다. 바다쪽에서 이 도시를 바라보면 도시 한가운데 뒷 배경으로 ‘테이블 마운틴(Table Mountain)’이 보인다. 문자 그대로 산 꼭대기가 마치 대패로 평평하게 밀어 버린 듯한 산이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캐이블카가 있으나 바람이 강해 운행을 못하는 날이 많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라이온 헤드힐(Lion's Head Hill)과 시그널힐(Signal Hill)이 그 밑에 내려 보이는 캐입타운 항구를 지켜주듯이 서 있다. 시그널힐에서 북쪽으로 2km 정도를 내려가면 요새 월드컵 경기가 열리고 있는 그린포인트(Green Point) 축구장이 있다.

테이블 마운틴에서 시내까지는 내리막길이고, 17세기에는 언덕이 끝나는 지점에서 해안까지는 늪지대였다. 네덜란드인들은 17세기 중반에 이곳에 도착하여 정착하면서 바다쪽으로 넓게 매립을 하였으므로 오늘날 캐입타운 시내의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는 곳에서 해안까지는 모두 매립된 곳이다. 그러나 매립한지 오랜 시간이 흘렀으므로 이곳에 막상 가보면 매립지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이 매립지 가운데에는 1487년, 희망봉을 처음 발견한,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돌로뮤 디아스’의 동상이 서있다. 이 동상은 포르투갈 정부가 1952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에 기증한 것이다.

희망봉(Cape of Good Hope)은 테이블 배이(Table Bay; 캐입타운 항구)에서 약 60km 더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희망봉 근처해역은 워낙 파도가 심하고 돌풍이 불므로 초기 유럽인들은 그 곳을 ‘돌풍의 곶(Cape of Storm)’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이곳을 항해하는 선박은  바람에 밀려 육지쪽으로 가다가 침몰하는 것을 면하기 위해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를 행해하였으므로, 희망봉은 1489년에 발견되었지만 테이블배이는  그 뒤 14년이 지난 1503년에 포르투갈 항해가에 의해 발견되었다.

16세기부터 네덜란드인들은 향료제도(인도네시아의 동부해역)에서 나오는 향료를 거의 독점하여 유럽에 보내며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네덜란드인들이  캐입타운에 상륙하여 이곳을 기지로 만든 것은 초기에는 향료무역 석권을 위한 중간기지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점차 네덜란드 농민들도 이곳에 이주해 옴으로써  또 하나의 네덜란드를 남아프리카에 만들려고 하였다. 여하간에 16세기부터 막대한 수익을 창출해주는 향료무역을 위해 네덜란드는 캐입타운에 중간 보급기지를 만든 것이다. 향료를 싣기위해 캐입타운을 떠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 Vereenigde Oost-Indie Compagnie)의 배는  인도양을 가로질러 실론(오늘날 스리랑카)남부의 갈(Galle) 기지와 말라카 해협의 말라카 기지를 경유하여 바타비아(오늘날 자카르타)와 향료제도의 중심지인 떠르나떼(Ternate; 술라베시섬의 동쪽에 있는 섬)까지 13,000km 에 달하는 거리를  항해하였다. 그리고 향료를 싣고, 캐입타운에서 암스테르담까지 13,000km 를  항해해야하는 선박을 위하여 캐입타운은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캐입타운의 가장 중심지(오늘날도 가장 중심지임)에 1652년에 회사 농장(Kompanjiestuin; Company's Garden)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 생산되는 야채, 과일, 곡식 등의 농산물을 캐입타운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들뿐만 아니라 향료무역과 관련되어 캐입타운을 오고가는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에 공급하려고 한 것이다.

1687년에 네덜란드 화가가 그린 테이블 배이와 테이블 마운틴 그림을 보면 300년 이상 지난 오늘날에 보아도 회사농장의 위치와 면적의 모양을 쉽게 식별할 수 있다. 회사 농장(정원)은 테이블 마운틴 산기슭으로 올라가는 평지에 만들었는데 테이블 배이에서 볼 때 농장의 왼쪽 입구에는 동인도 회사의 거대한  숙소가 있어 캐입타운을 오고 가는 회사 직원이나 공무원, 상인들은 여기서 숙박하였다. 오늘날 캐입타운 시내 중심에 있는 회사농장 지역에는, 물론 옛날처럼 농사를 짓지는 않고 바로 그 자리에 국회, 국립 도서관, 식물원, 미술관, 노예 박물관, 유태인 학살 박물관, 유태인 교회 등이 들어서 있다. 그러므로 점심시간에는 이 근처 관공서와 회사 사무실 직원들이 이곳에 많이 놓여있는 벤치에 와서는, 혼자서 또는 친구들과 담소하며 샌드위치나 햄버거 등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식사를 한 뒤에는 나무가 우거진 길을 따라서 산책하기도 한다. 농장은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캐입타운 책임자인 리벡(Jan Van Riebeeck)의 지시에 따라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직원인 붐(Hendrik Boom)이 중심이 되어 1652년 4월 29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인근의 하천물을 끌어들여 만든, 직사각형이었던 농장의 크기는 23,000평(76,000㎡)이었으나 현재는 절반정도만 남아있다. 한편, 붐은 농장 한쪽에 식물원도 만들었다. 붐의 뒤를 이어 1692년(또는 1693년)부터 1697년까지 농장 책임자가 된 올덴랜드(Hendrik Bernard Oldenland),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할토(Jan De Hartogh), 아우게(Johan Andries Auge) 등이 책임자가 되어 식물원을  조성하면서, 올덴랜드는 회사정원 안에 제대로 된 길과 분수를 만들었고 아우게의 임기중(1747~1783년)에 이 식물원은 비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름다운 식물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이곳 농장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외국으로 도 수출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향료식물은 유럽과 인도네시아(당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음)에 수출되었다. 이렇게 야채와 과일 농장 옆에서 시작한 작은 식물원이 후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물원이 된 것이다. 식물원에는 남아프리카 원산지인 수목뿐만 아니라 미국, 호주 등 여러나라에서 가져온 꽃, 관목, 수목이 심어졌다. 초기에는 약 400종의 수목을 심었으나 곧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사업이 기울게되자, 1795년 영국인들이 케입타운에 상륙하여 이곳을 잠시 점령하였다. 그당시 영국인들은 네덜란드인들이 만들어 놓은 회사정원 식물원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므로 식물원은 황폐하게 되었다. 그러나 캐입타운은  1803년, 네덜란드인들 손에 다시 들어왔다. 이때 네덜란드인들은 회사정원안에 긴 변 가운데를 따라서 도로도 만들고 식물원 주위를 다시 정리하여 그 아름다움을 회복시켰다. 당시 이 도로 양편에 심어놓은 귤나무(Citrus)와 참나무는 엄청나게 자라서 오늘날  이곳을 걸어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더운 날씨에도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주며, 오늘날에는 이 중앙도로를 정부가도(Government Avenue)라고 부른다. 1806년, 다시 캐입타운에 돌아온 영국인들은 회사정원 옆에, 국회의사당, 도서관, 성당, 박물관,미술관 등 많은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건축한 건물들은 아직도 남아있고 대부분이 원래 건축한 목적대로 오늘날도 사용되고 있다. 1848년, 영국은 제대로 된 식물원을 만들기로 계획하여, 그동안 네덜란드인들이 밭으로 사용하던 곳(현재 국립도서관 정문 앞)에  식물학자이며 정원사인 맥기본(James McGibbon)의 주도로 식물 분류학에 따른 식물원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1911년에는 회사정원 구역안에 있는 식물원에 석조 대문을 만들어 놓아 제대로 된 식물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대문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오늘날 현지인들은 이 식물원을 공공 정원(Public Garden)이라고 부른다. 말이 정원이지 많은 귀중한 수목을 갖고 있는 식물원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있는 모든 수목에는 일반명과 학명이 붙어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자 식물원 안에 햇빛이 잘 들도록 하기위해 많은 귀중한 수목을 잘라 내어버렸다. 영국은 1892년에 식물원을 포함한 회사정원 전체를 시(市)에 기증하여  오늘날에도 캐입타운시가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다.  당시 야채, 고일 농사를 짓던 밭은 이미 다 없어졌으나 식물원은 아직도 남아있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물원이 되었다. 역사가 300년이 넘는 식물원은 세계적으로 얼마되지 않는다. 애덜레이(Adderley)거리 쪽에 있는 정문을 통해 들어가 회사 정원을 살펴보던중 뜻밖에 일본 석등(石燈)이 세워진 것을 보았다. 내용을 읽어보니 20세기 초에 영국정부가 일본인 이민자를 캐입타운 지역에 받아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일본정부가 1932년 8월에 기증한 것이다.

필자는 공공 정원(식물원)을 돌아보던중  식물원 한 가운데, 높이 50m, 직경 2m의 크기로서 우뚝 높이 서 있는 노폭 소나무(호주와 뉴질랜드 사이에 있는 Norfolk 섬에서 자라는 남양삼나무과의 수목이다. 일반명이 소나무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소나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삼나무임)를 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식물원 사무실에 들려서 관련 자료를 조사하던 중 우연히 1851년에 영국 화가가 그린 공공 정원의 모습을 보았다. 그 그림 오른편 한구석에는 높이 10m 정도의 노폭 소나무(노폭섬에서 옮겨와서 식재됨)가 그려져 있다. 방금전에 본 수목이다. 이 노폭 소나무(Araucariaceae Araucaria heterophylla)가  식물원의 지나간 세월을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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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주혁. 서울대 농대 임산가공학과를 졸업했다. 1978년 이건산업에 입사해 이건산업(솔로몬사업부문) 사장을 역임했다. 파푸아뉴기니 열대 산림대학을 수료했으며, 대규모 조림에 대한 공로로 솔로몬군도 십자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권주혁의 실용 수입목재 가이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