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식물원-연재를 시작하며
세계의 식물원-연재를 시작하며
  • 나무신문
  • 승인 2010.06.28 00: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식물원이 열어주는 세계의 역사

 

권주혁 이건산업 고문·강원대 산림환경대 초빙교수

 

 

 

우리는 일반적으로 식물원(植物院)이라하면 여러 지역에서 생장하는 각종 꽃, 풀, 관목, 나무 등을  어떤 특정한 장소에 모아놓고 관리하면서 일반인을 포함하여 이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쉽게 방문하여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일상생활에 찌든 시민들이 기분전환내지 휴식차 둘러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 굴지의 식물원들 가운데에는 식물 자체보다, 식물을 통하여 그 밑에 깔려 있는 그 지역에 대한 식물지리학 내지는 세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자연사(自然史)의 일부로서 식물에 대한 공부는 근대 자연과학과 세계 역사에 대한 이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요즈음 거의 매일 신문, TV 등 언론 미디어를 통해 하루에도 몇 번씩 ‘글로벌’ 이란 말을 보고 듣는다. ‘글로벌 경영’, ‘글로벌 금융위기’, ‘글로벌 인재’, ‘글로벌 대학’. ‘글로벌 기업’, ‘글로벌 표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15세기에 포르투갈을 위시하여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소위 말하는 서유럽의 해양강국들은 당시 ‘글로벌’이라는 단어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그때부터 지구를 하나로 보는 인식과 관점을 가지고 지중해권(地中海圈)을 넘어서, 대서양을 거쳐 인도양과 태평양을 넘나들며 나름대로의 글로벌 경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세계를 하나로 보는 관점에서 세계 도처에 있는 동식물과 광물을 조사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유럽사회가 인도와 동남아시아(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해 오는 열대 식물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육두구(肉荳寇;Nutmeg), 정향(丁香;Clove) 등 열대식물이 가진  의약적 효능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들 열대 식물들이 흑사병, 일반병 등에 특효약이라고 알려지자 1544년, 이탈리아의 파도바(Padova)를 시작으로 플로렌스, 나폴리, 로마, 볼로냐, 팔레르모, 프랑스의 파리,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 등 유럽 곳곳에, 약용식물들을 한 곳에 모아서 재배하는 곳이 등장하였다. 이렇게 최초의  식물원은 세계 각지에서 자라는 약용식물(육두구, 정향은 제외)을 재배하고 연구하는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한편, 유럽보다 5~6세기 앞서, 인도의 식물학 지식은 아라비아 의학에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의학지식은 12세기 후반에 유럽에 전해졌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15세기말부터 지리상의 발견이 진행되면서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에서 식물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즉, 지리학과 식물학의 지식이 서로 교차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유럽국가들은 식물학(자연)과 경제(중상주의)에 대한 지식이 외국(아메리카 신대륙, 인도, 동남아시아)을 지배하는데 필요한 핵심적인 국가정책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프랑스,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는 지리상의 발견과 동식물학 조사를 위해 경쟁적으로 탐험대를 세계곳곳에 파견하였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박물학 탐험을 통해 동남아시아를 독점하려고 한 반면, 스페인은 라틴 아메리카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박물학 탐험대를 계속 보냈다.

식물학에 관심이 많은 독일의 문호 괴테는 18세기말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가 쓴 책을 갖고 다니며 식물의 자연사를 배우기 위하여, 이탈리아 여러곳에 있는 식물원을 방문하였다. 그의 제1차 이탈리아 여행은 시실리섬의 팔레르모 식물원에서 마무리하였다. 결국 그가 쓴  ‘이탈리아 여행’은 자신이 직접 파도바, 베네치아, 밀라노,  로마, 나폴리, 팔레르모 등에서 보고, 만지고, 느꼈던 식물을 중심으로한 식물지리학 보고서라고도 말 할 수 있다. 

프랑스가 자기들 식민지 곳곳에 식물원을 만들어 체계를 만들어가자, 영국도 식민지 곳곳에 식물원을 만들었다. 양국은 식물학이 중상주의(重商主義) 성공에 큰 요인이라고 여겨서 식물원을 자국의 이익과 직접 연계된 중심기관으로 믿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영국은  경쟁국인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 보다 식물학 연구에 있어서 훨씬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식물원은 영국에 있고, 과거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에는 어디를 가도 식물원이 있다.

1977년에 목재회사에 입사하여,  30년 이상 근무한 필자는 1979년에 호주 시드니에 있는 식물원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회사일로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출장지 인근의 식물원을 방문하였다. 물론 그 때는, 앞서 언급한 식물원과 세계사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었고 단지 식물원에 있는 수목(樹木) 종류를, 회사 업무와 연관시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식물원에 있는 나무들의 원산지를 알게 되고, 왜 그 수목이 그곳에 오게 되었는가를 공부하면서, 몇 년 전부터 식물원이라는 창(窓)을 통해 어느 순간 문득, 세계 역사의 한 단면을 보게 되었다.

이번 나무신문에 연재하는 내용에는 비단 공식적인(국가나 지방정부에서 만든) 식물원 뿐만 아니고, 필자가 지난 30년 이상 해외출장을 통해 방문하였던 수목원, 견본림(見本林), 대학 식물원, 개인 식물원, 대규모 정원도 포함시켰다. 그리고 이들 식물원을 통하여, 필자의 얕은 세계사 실력을 배경으로 독자들과 함께 16세기 이후의 세계사 일부를 살펴 보고자 한다.

 

--------------------------------------------------

 

권주혁. 서울대 농대 임산가공학과를 졸업했다. 1978년 이건산업에 입사해 이건 태평양조림 사장을 역임했다. 파푸아뉴기니 열대 산림대학을 수료했으며, 조림에 대한 공로로 솔로몬군도 십자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권주혁의 실용 수입목재 가이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