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바다 울타리 동백꽃과 막걸리
여행/바다 울타리 동백꽃과 막걸리
  • 장태동
  • 승인 2007.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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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으로 빛나는 꽃의 아름다움도 하나같고 절정을 지난 꽃이 생을 접는 모양 또한 다 다를 게 없는데, 하나같이 펴서 남다르게 지는 꽃이 있으니 동백꽃이 그렇다. 동백꽃이 지는 모양을 보면 활짝 피어난 꽃 그대로 봉오리 째 떨어진다. 송두리째 떨어져 나뒹구는 붉은빛 꽃송이가 시인의 눈에 거슬렸나보다.

서정주 시인은 이른 봄나들이 길 한 토막을 잘라 이렇게 읊었다.    ‘선운사 골째기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피지 안했고/막걸리집 여자의/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더께 앉은 생을 걸러 내지 않고 그대로 내 뱉는 술집 작부의 목 쉰 육자배기 가락에서 얼고 녹는 진땅에 떨어져 뒹구는 붉은 꽃송이를 봤던 것이다.  

나는 해마다 3월이면 남해에 간다. 거기에는 남해의 푸른 바다가 있고, 육중하면서도 날렵하게 해협을 가르는 남해대교가 있고, 환장할 것 같은 벚꽃이 있고, 은파금파 빛나는 망망한 바다도 있지만 내가 남해에 가는 가장 큰 이유는 ‘다랭이마을’ 때문이다.  

바다로 곤두박질치는 비탈에 마을이 있다. 바다에서부터 산 중턱까지 비탈을 따라 논밭이 층층이 쌓여 있다. 바람 한 점 걸러 질 곳 없는 바닷가 언덕 마을 사람들이 손으로 돌을 고르고 산을 깎아 논빼미 하나 쌓고 또 쌓아 삶의 터전을 개척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황무지를 사람 사는 마을로 바꾸어 놓았더니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알고 찾아오는 이름 있는 마을이 됐다.

‘다랭이마을’ 중간 쯤 있는 가게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막걸리를 파는 할머니집이 있다. 그냥 집에서 막걸리를 빚어 판다. 그 집 마당에 앉으면 망망대해가 눈앞에 펼쳐진다. 마당 한 쪽에는 씨를 심어 키운 동백나무가 있다. ‘마당에 앉아 바라보는 바다’와 ‘바다가 키운 동백’과 ‘할머니가 손수 빚은 막걸리’, 셋 중 하나가 빠지면 허전할 것 같다.

아직 할머니가 살아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손님이 가면 대청마루로 앉힌다. 마루가 차면 마당에 간이식탁을 마련해 준다. 상을 차려 나오는데 안주는 갓 무친 겉절이나 김치가 고작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곳에 가면 다른 안주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바다처럼, 동백처럼, 비탈져 쌓인 논밭처럼 그냥 그렇게 나도 거기에 스며든다.

꽃샘 일고 땅에 숨구멍 트일 때 ‘다랭이마을’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육자배기 한 자락 불러 제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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