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섣달그믐 옛날 시골의 밤
여행-섣달그믐 옛날 시골의 밤
  • 장태동
  • 승인 2007.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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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세월, 그때 우리는

전통과 세시풍속이라는 딱딱한 말에 갇힌 옛 추억이 안쓰럽다. 그중에서도 한 해가 시작되는 첫 달에는 설과 대보름이 있어 조용한 시골마을이 축제처럼 들썩였다. 대보름이 사라지고 설도 차례상에서 끝나는 요즘 세태를 탓할 수 없지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여 놀았던, 옛날 시골에서 새해를 맞이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해본다.   

지금처럼 쭉 뻗은 도로에 대리석같이 매끄러운 길이 아니었다. 산 구비 따라 구불거리고 흙먼지 이는 흙길, 그나마 그 길 따라 들어오는 버스도 하루에 두 대 뿐인 시골마을에 나의 유년이 있었다.

아궁이에 군불 때고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섣달그믐 시골의 밤은 할머니와 엄마와 고모들이 둘러 앉아 떡을 썰고 만두를 빚던 온 집안의 축제였다. 우물가 전선줄에 바람 감기는 소리가 ‘휭휭’대는 한겨울 밤, 문풍지를 뚫고 들어와 윗목에 놓아둔 걸레마저 꽁꽁 얼려버리는 삭풍에도 식구들 머리 위를 비추던 백열등 주황빛이 따듯했다.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고 나는 아랫목 할머니 무릎 옆에 토끼처럼 웅크리고 누워 아른 거리는 불빛 아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설날 아침 댓바람부터 동네 아저씨들은 복조리를 가득 담은 지게를 메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한 해 복을 나눠주었다. 복조리 아저씨를 따라 나선 조무래기들이 몇몇은 되었고 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가 골목을 따라 이어지면서 설 날 아침이 열렸다.

대보름 놀이는 지신밟기부터 시작됐다. 마을에서 장구 깨나 두드린다는 사람들이 모여 사물을 치며 이집 저집 돈다. 대청이며 방이며, 부엌, 샘 가, 장독대, 곡간, 변소 등 집안 구석구석을 돌며 집안을 관장하는 모든 신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잡귀를 몰아내는 놀이였다. 

온 동네에 지신밟기가 끝나면 그 다음은 아이들 세상이 시작됐다. 깡통에 불을 넣고 휘휘 돌리며 논두렁으로 냇가로 뛰어다녔다. 이렇게 쥐불을 돌리다가 논바닥으로, 논둑으로, 강으로 깡통을 던져 버렸다. 아래 말, 윗말로 편을 나누어 깡통싸움을 일삼기도 했는데 간혹 불깡통에 맞아 머리카락을 태워먹던 아이들도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난 아이들은 연을 날리러 들판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연줄에 모래나 유리조각을 묻혀 다른 아이들의 연줄을 끊어 먹는 놀이를 즐겼다. 연줄이 끊어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아이들은 목이 부러져라 하늘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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