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때로는 사는 게 영화 같다
여행-때로는 사는 게 영화 같다
  • 장태동
  • 승인 2007.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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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없는 호미곶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기웃거리는데 저 옆으로 불빛 하나 보인다. 식당이었다.

바닷가 식당에 앉을 때면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최민식이 주연을 맡았던 ‘꽃 피는 봄이 오면’이란 영화인데, 강원도 탄광촌 어느 학교에서 임시직 음악선생으로 있는 최민식은  그를 찾아 온 친구와 어느 바닷가 식당에서 소주를 마신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은 둘은 시시콜콜한 생활의 편린들을 주워 올리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파도가 부서지는 백사장에 한 여자가 앉아 있고 그 옆에 아이 하나가 바다를 향해 트럼펫을 분다. 나는 최민식처럼 혹은 그의 친구처럼 소주를 마셨고, 창 너머 짙은 어둠이 나를 위로했다.

새벽공기를 헤치고 가슴 시리게 불어오는 바람 맞으며 기다리는 붉은 해.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기 전 바다는 가장 사납게 출렁인다. 바람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사방에서 불어 닥친다. 생명을 잉태한 모든 것들이 탄생의 순간까지 겪어야 하는 고통과 몸부림처럼 바다는 온통 정신없이 휘몰아치다가 수평선 위로 붉은 해 하나 띄우고는 고요해진다. 생명 탄생의 바다 앞에서 사람들은 말을 잊는다.      

일출을 보러 새벽 바다에 나갔다 와보니 민박집 할머니께서 미역국을 끓이시고 계셨다. 함께 드시자고 했으나 할머니는 나중에 먹겠다고 자꾸만 손을 뿌리치신다. 그러시고는 미역 쌓아 놓은 곳에 앉으시더니 미역을 다듬으신다. 할머니가 직접 미역 농사를 지으시는데 올 해는 미역이 잘 됐다면서 미역 자랑을 늘어놓으신다.

그리고는 미역으로 라면 끓이는 법, 미역쌈밥 등 미역으로 해먹을 수 있는 갖은 요리 방법을 설명하시는 끝에 한숨이 이어진다. 나 보고 결혼 했느냐고 묻기에 딸 아들 낳았으니 200점 아빠라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할머니는 웃음 대신 눈물을 보이셨다. 젊은이들 앞에서 주책이시라면서도 눈물을 그칠 줄 모르시는 할머니는 몇 년 전 태풍 매미 때 아들을 잃으셨다고 한다.

자식 또래를 보면 다 자식 같아서 그렇게 우셨던 것이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할머니 어깨를 주물러 드렸더니 할머니는 눈물을 머금은 채 환하게 웃으신다. 짐을 정리하고 민박집을 나서는데 집에 가서 끓여 먹으라며 큰 봉지에 미역을 담아 주셨다. 다 내 자식 같다며…. 벌써 해가 하늘 가운데로 올랐다. 마음에 담을 수 없을 만큼의 사연들이 넘치고 흐르는 겨울바다는 따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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