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연서(戀書)
라일락 연서(戀書)
  • 서범석 기자
  • 승인 2021.07.2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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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꽃이 있는 창 45 - 글 사진 서진석 박사

라일락(Lilac)

라일락은 다른 두 이름-수수꽃다리, 리라꽃-으로도 불리운다. 라일락보다는 작고 동그레한 잎과 꽃의 향기가 진한 미스김 라일락도 있다. 이곳 세미트리와 여느 집 앞에는 보라색 라일락이 꽃을 한창 피우고 있다. 우리 집 뒤란에는 제법 커서 옆집 펜스 위로 가지가 훌쩍 넘어간 라일락이 2그루 있다. 오성과 한음의 얘기가 아니더라도 라일락 꽃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그저 한담(閑談)하시며 보면서 그윽한 향기를 즐겨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5월이면 꽃봉오리를 보라색으로 환하게 함빡 터뜨리는 함박꽃이라고 하고 싶다.  저 5월의 선물이 언제부터 심겨져 있었을까? 전에 살던 분은 어떤 분들이었을까? 저 라일락 밑에서 잎이 피고, 꽃이 피고, 향기를 안기고, 꽃잎이 져 딱딱한 쌀겨 같은 씨를 곁에 새 꽃 다 달도록 떨구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추억을 잊지 못하는 우리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다. 자잘한 꽃의 미스김 라일락도 그러하지만 십자화 구조를 기본으로 촘촘히 열은 저 무수한 포도송이 같기도 한 꽃무리-사실은 자잘한 꽃잎이 겹구조로 4~8장 포개어 핌-를 보면서 공중에 떠도는 향기가 그의 존재감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오월이 오면 이 나무 밑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걸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단 말인가? 종시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다만 이 나무의 그윽한 꽃 향기가 지속되는 한 삶은 달콤하지만 때론 쓰기도 한 추억을 그리면서 살아도 좋은 것이 아닐까? 

미스 김 라일락마저 지는 유월에는 하얀 좁쌀 같은 무수한 꽃망울을 맺어 마치 수수꽃 뭉치처럼 생긴 꽃몸체(花器)에서 신선한 향기를 풍겨주는 라일락 나무(Ivory Silk Tree, Syringa Reticulata ‘Ivory Silk’)를 이곳 집 앞뜰(前庭) 혹은 세미트리(Cemetery)에서 대하게 됨은 또 다른 행복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봄을 넘기고, 여름에 들어서면서 조그만 뒤란이 배양토를 사 와서 아내가 모종을 하는 들깨, 상추, 고추 등의 푸성귀의 텃밭이 되어 간다. 욕심을 낸다면 봄이면 씨앗을 땅에 넣고, 손에 흙을 묻히고, 흙 냄새를 맡으며, 꽃삽을 들고 조그만 ‘타샤의 정원’을 만들 수 있다면…    

이육사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에 손님을 맞고 싶다고 했듯이, 나도 라일락 꽃 주저리 주저리 열린 어느 날 문득 잊혀진 추억을 도란도란 얘기할 수 있는 정겨운 손님 한 사람을 맞고 싶다. 봄은 인생의 유년기처럼 제자신 스스로 갖가지 꽃을 피우고, 그 맑은 생명력을 지녀가기에 정녕 아름다운 시간이 아닐런지요! 

베사메무초의 리라꽃 던져두고 님을 찾아 떠나고픈 계절이 곁에 와 있다. 현인 선생님의 Besame Mucho(Kiss me much라는 뜻이라고 함)를 들으면서 첫사랑의 달콤함에만 머물고픈 향기를 맡고자 눈을 감으며 코 키스를 하는 버릇을 올해도 감출 수 없다. 어선가 ‘뉠리리야 뉠리리 뉠리리 맘보~’ 청춘의 노래가 오버랩되는 싱그런 초여름에 어느덧 들어와 있다.

 

라일락 연서(戀書)

라일락 향내 풍기는 교정에 섰다
잃은 것은 사랑하자고 자꾸만 졸라댄다
이렇게 나의 스무해 꿈날은 시작되었습니다

삶이 창공을 유유히 떠가는 솜털구름 같았고
삶은 창해에 유유히 떠있는 돛배 같았습니다
이런 꿈날에는 오월이 있었고 연두빛이 지쳐 초록이 될 때까지 싯귀를 읊조렸습니다

벚꽃 터널도 지나고, 모란 꽃밭에도 서성이고, 아카시아 꽃 필 무렵이면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과 순이의 뜨거운 숨결도 곁에 함께 있었습니다

어느 가을날 혼자 육십령을 넘었더랬습니다
남들도 그 고개를 더러는 넘었겠지요
그 사이 바람이 불고, 천둥과 우레가 치고, 낙엽이 진 길 위 눈이 와서 쌓이고는 때론 그 길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올해에도 내게 오월은 약속처럼 와 있습니다
온 봄내 당신 꽃을 피우고자 기다림으로 살았습니다
무슨 꽃이 제일 이쁠까 내 가슴을 설레게 하여 엎으러져 하냥 울고 싶도록 할까요?

복사꽃 사진 속에 내 어머니가 웃고 계시네요
그 사진이 바랠 때까지 품에 안고 살았습니다
어릴 적 순이는 지금쯤 누구의 엄마가 되었을까요?

라일락 향내 풍기는 뒤란에 섰다
잃은 것은 사랑하자고 아직도 졸라댄다

님이여! 꽃 그늘 속에 눕고 그 꽃 그늘 속에서 내게 남는 고운 이마와 아미에 입맞추는 시간을 허락하여 주소서

 

서진석 박사 
서울대학교 1976년 임산가공학과 입학, 1988년 농학박사 학위 취득(목질재료학 분야). 국립산림과학원에서 1985년~2017년 연구직 공무원 근무(임업연구관 정년퇴직). 평생을 나무와 접하며 목재 가공·이용 연구에 전력을 기울인 ‘나무쟁이’. 시집 <숲에 살아 그리운 연가 戀歌>.
현재 캐나다 거주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