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정인에 대한 경이로운 소문
작가 이정인에 대한 경이로운 소문
  • 서범석 기자
  • 승인 2021.03.12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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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풍랑 속에서 가장 맹렬하게 헤엄친다"
이정인 작가.

작가 이정인에 대한 소문을 처음 들은 건 인천 목재단지에서였다. 러시아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합판을 수입해 국내에 판매하고 있는 한 목재회사 대표의 어지러운 책상 위에 열병을 앓는 어린아이의 순결한 살결에 이물스럽게 올라온 작은 종기처럼 이정인 작가가 그렇게 솟아 있었다.

엄지손가락만한 콘크리트 덩어리 위에서 녹을 입은 철사가 한 바퀴 구부러져 올라와 있고, 그 위에 딱 그 콘크리트 기초만한 물고기가 있었다. 물고기는 강가에 떠다니는 나무토막에 색을 입힌 것이다.

‘버려진 폐목재로 작품을 만든다’는 게 작가 이정인에 대한 첫 번째 소문이었다. 강이나 바다에 떠밀려온 나무토막이나 가구를 만들 때 나오기 마련인 나무 부스러기들을 모아서 그 위에 색을 입히고, 그렇게 다시 태어난 물고기들을 캔버스에 옮긴다는 것.

이 이야기를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재료비는 안 들겠구나, 치수안정성은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하는 목재산업 전문지 기자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또 폐목재로 목돈 꽤나 모아 놓은 목재 재활용 업체 사장 집무실에 걸어놓으면 제격이겠는 걸, 하는 장난스런 생각도 떠올랐다.

이정인에 대한 반감도 있었다. 그렇게 버려진 나무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게 된 이유가 목재 전문기자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작가 이정인은 가구를 만드는 일로 목재를 처음 접했다. 그런데 그렇게 베어지는 나무가 자기 살이 베어지는 것처럼 아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구 만들기를 접고 버려진 폐목재를 모아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뭐야, 목재를 많이 사용해야 지구환경도 지키고 사람들의 생활환경도 지킬 수 있는데….’ 

어찌됐든, 목재회사 대표 일행과 합류해 이정인 작가의 전시장을 찾은 건 작년 겨울의 일이다.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기도 전이니 꽤 오래 된 일이다. 이정인 작가와 친분이 있던 목재회사 대표가 ‘폐목재로 그린 그림도 목재이니, 나무신문이 기사를 써야 한다’고 생짜를 놓았다.

그렇게 작가 이정인의 그림 앞에 섰을 때 내 안의 깊숙한 곳에서 이 문장이 물고기처럼 낚여 올라왔다. “물고기는 풍랑 속에서 가장 맹렬하게 헤엄친다.” 

기사는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재료 원가나 따지는 산업기자 나부랭이가 쓸 기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이야기는 모두 잊었었다. 잘 나가던 직장인 이정인이 어떻게 어울리기 힘든 희귀병을 얻었는지, 강원도 산골에서 연세 40만원의 축사나 다름없는 농가에서 생활하며 어떻게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는지, 그림으로 유명세를 얻으면서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강가 저택에서 생활하다가 지금의 청평 북한강변 새 작업장에 둥지를 튼 이야기, 그냥 버려진 폐목재가 아니라 태풍이 지난 자리에서만 얻을 수 있는 ‘엄선된’ 재료를 사용하는 이유, 캔버스에 아홉 번의 색을 입히는 까닭, 풍랑 속을 헤엄치는 작가와 그의 작품이 어떻게 닮았는지 등등…. 모두 잊었다. 왜? 내가 쓸 기사가 아니니까.

그렇게 내 안에서 잠시 일었던 보잘 것 없는 풍랑은 가라앉았다. 함께 헤엄치던 물고기도 속물스러움의 구덩이 속으로 숨어들었다. 더 늦어지기 전에 이 부끄러움을 여기에 꺼내놓고 치유를 시작하려 한다. 풍랑 속으로 들어간다.

 

내게 물고기는 생명이고, 에너지다.

살아 있듯 날렵하고, 때론 수천 마리 떼로 모여

강렬한 에너지를 품고 품어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존재이고 싶다.

- 이정인 작가노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