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커스를 위한 소네트(sonnet)
크로커스를 위한 소네트(sonnet)
  • 서범석 기자
  • 승인 2020.09.2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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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꽃이 있는 창 29 - 글 · 사진 서진석 박사

크로커스를 위한 소네트(sonnet)

나 어릴 적 옆집 순이(順伊)를 좋아했었어.
보랏빛 저고리에 갸름한 얼굴의 그 아이!

 

오늘 옆집 전정(前庭)에서 나를 보고 왠 아가씨가 인사를 하더군.
모딜리아니 쟌느의 빼어올린 목을 닮았어.
봄날 노란 병아리 입을 닮은 볼우물을 짓네.
청초하여 그 이름을 물어보니 크로커스(Crocus)라고 해.

 

너처럼 보라 원피스에 갓 씻은 해말간 얼굴이 
노란 보조개 웃음을 띠는 걸 생각해 보았니?
그 날 이후 겨울 다 가도록 순이 너와 가깝다가도
봄만 되면 무슨 병에 걸린 듯 자꾸만 옆집 그녀에게 마음이 가네.

 

순이(順伊)야! 그렇다고 바람둥이라고 욕하지 마.
넌 멀리 있고, 너를 닮은 그녀가 가까이 있어.
오늘도 일어나면 너와 눈을 마주치듯 인사를 하게 돼.

 

꿈에라도 살포시 기대어오는 이국의 봄처녀를 생각해 봐.
설레이지 않는 남정네가 어디 있겠니?
그녀(女)가 있어 널 처음 본 날처럼 설레이는 봄이 왔어.

 

크로커스(Crocus)
내가 사는 이곳은 단독주택과 콘도(condo)들이 많은지라 그 앞뜰에는 잔디와 화단으로 나직한 공간이 이루어져 있다. 이른 봄이면 땅이 풀리고, 물이 풀리고, 아련한 신기루인 듯 땅에서 피어오르는 싹(bud)와 나뭇가지에 돋아나는 움(sprout)을 마주하는 것은 큰 기쁨이요 설레임이다.  우리 고국에선 지천으로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는 것으로 봄날이 오고 감을 동요나 가요로 노래하곤 했다. 하지만 이곳의 봄, 특히 시선이 자연스럽게 머무는 이웃들의 앞뜰(前庭)에서의 봄이 늘 궁금했다. 그런데 안 보던 꽃과 식물들이 하나씩 그 공간을 채워감을 보면서 삶, 꽃에 대한 공부와 사유(思惟)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겨울자락이 걷혀가는 초봄 무렵, 보라색 또는 하얀색의 여섯 장 고스란히 포개진 꽃잎 속에 꿈꾸듯 노란 꽃술을 꼬옥 안은 크로커스(crocus)란 꽃을 만났다. 그 가녀리고도 청초한 모습은 풋풋한 서양(西洋) 아가씨를 처음 대하는 느낌이었다.

글 · 사진 서진석 박사
국립산림과학원 임업연구관 정년퇴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