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식물원
일본 도쿄 식물원
  • 김오윤 기자
  • 승인 2019.02.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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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식물원이 열어주는 세계의 지리와 역사 (64)
고이시가와 식물원.

[나무신문] 도쿄의 분쿄구(文京區)에 위치하고 있는 고이시가와(小石川) 식물원을 방문하기 위해 필자는 지하철 마루노우치선(丸ノ內線)을 타고서 모가다니(茗荷谷)역에 내렸다. 역에서 10여분간 식물원을 향해 걸어가는 도로 주변에는 3월말이므로 벚꽃이 만개하였다. 이런 봄의 향연을 보기 위해 일부러라도 올만한데 식물원 방문길에 이런 광경을 보니 보너스라도 받은 기분이다.  1877년에 도쿄 대학의 부속식물원으로 된 이 식물원은 현재도 국립 도쿄 대학소속으로서 식물학의 교육과 연구를 목적으로하는 도쿄 대학의 교육실습 시설이다. 그러므로 현재 고이시가와 식물원의 정식 이름은 “도쿄 대학대학원 이학계 연구과 부속 식물원(東京 大學大學院 理學系 硏究科 附屬 植物園)”이다. 이 식물원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몇 안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식물원 가운데 하나이다. 17세기 초에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에도(江戶: 오늘날의 도쿄)에 막부(幕府)를 세우면서 1638년에 이곳에 약초원(藥草園)을 만들고 “고이시가와 약원(藥園)”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오늘날 고이시가와 식물원의 시작이었다. 당대에 일본 전역에서 전투로 이름을 날리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등 무장(武將)들은 강한 무장의 이미지와는 달리 뜻밖에 꽃을 좋아하였다. 참고로 18세기 초 우리나라 한양(서울) 인구가 20만명 정도였음에 비해 에도는 이미 100만명이 넘는 대도시였다.  

식물원 안에는 식물원의 긴 역사를 말해주는 유서 깊은 식물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면적은161588㎡(48880평)로서 평지, 경사지, 저지(低地), 샘터 등 지형 변화에 응용하여 다양한 식물이 식재되어 있다. 또한 이 식물원은 일본의 근대 식물학 발상지로서 오늘날도 자연과학 연구지(硏究誌) 발간을 통해 식물학 교육과 연구의 장(場) 역할을 하고 있다. 식물원 정문을 들어가 낮은 언덕에 올라가면 식물원 본관이 나오는데 이 건물 안에는 식물표본 70만점, 식물학 도서 약 2만권이 있어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한편, 도쿄지역에서는 온도, 토양, 날씨, 해발 고도 등의 요인 때문에 재배하기 어려운 식물에 관한 교육과 연구를 주목적으로 하기 위해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방되기 훨씬 이전인) 1902년에 이미 혼슈(本州) 동남부 지역에 위치한 도치기(栃)현의 닛코(日光)시에 분원(分園)을 만들었다. 이 분원은 그때부터 “닛코 식물원”으로 불리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히말라야 삼나무(소나무과 Cedrus deodora ).

고이시가와 식물원안에는 일본, 한반도, 중국을 포함한 동(東)아시아에 분포하는 고등식물을 포함하여  북아메리카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가져 온 식물(원예품종을 제외하고) 1500여종과 별도로 열대와 아열대지역 식물 1500여종을 온실 안에서 재배, 전시하고 있다. 온실 안에 있는 식물 가운데에는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도 있고 열대와 아열대에서 생육하는 귀한 식물도 있어 연구와 교육 목적 이외 식물다양성의 보전을 위해서도 공헌하고 있다. 일본은 이미 1875년에 이 식물원 안에 서양식 온실을 만들었다. 1875년이라면 일본이 서양식 군함 운요호(雲楊號)를 보내 강화도를 포격한 사건이 일어난 해로서 그 다음해에 조선은 일본의 강압아래 치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을 맺었다. 그 만큼 당시 일본은 조선보다 과학을 배경으로 한 국력이 크게 앞서 있었다. 1875년에 만든 온실은 그 후 개축을 하였으나 태평양 전쟁때 파괴되었다. 1964년에 다시 철골로 복원한 온실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이탈리아의 파도바 식물원, 피사 식물원 등이 16세기에 세워졌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러한 서구의 식물원에 대해 정보나 지식의 교류가 전혀 없었으나 스스로 식물원(약초를 연구하기 위해) 건립에 관심을 갖고서 이 식물원을 세운 것이다. 서구의 식물원 역시 초기에는 약초를 연구하기 위해 설립하였으므로 동양과 서양이 서로 만나서 상의하고 세운 것이 아님에도 이렇게 동서양이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같은 연구 목적을 갖고 초기형태의 식물원을 만들었다. 즉, 17세기에 이미 일본인들은 유럽인들이 놀랄 만한 식물학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서구보다는 5세기, 일본보다는 4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 한국인 가운데 식물원의 존재 의미를 연구기관으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오늘날에도 학자들을 포함한 국민의 대부분이 식물원이란 도시생활의 휴식 공간, 가족 나들이 코스, 진기한 식물을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리적으로는 이웃이지만 자연과학의 기초인 식물학을 휴식측면에서 보는 나라와 연구측면에서 보는 나라의 지표는 2018년까지 노벨 과학상 수상 0대 23대이라는 숫자로 나타났다. 필자는 이것이 여기에 그치지 않고 0대 100 또는 200까지 계속될 까 우려된다.  


권주혁  
용산고등학교 졸업(22회), 서울 대학교 농과대학 임산가공학과 졸업, 파푸아뉴기니 불로로(Bulolo) 열대삼림대학 수료, 대영제국훈장(OBE) 수훈. 목재전문기업(이건산업)에서 34년 근무기간중(사장 퇴직) 25년 이상을 해외(남태평양, 남아메리카) 근무, 퇴직후 18개월  배낭여행 60개국 포함, 130개국 방문, 강원대학교 산림환경대학 초빙교수(3년), 전 동원산업 상임고문, 현재 남태평양 연구소장, 전북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외래교수. 국제 정치학 박사, 저서 <권주혁의 실용 수입목재 가이드>, <세계의 목재자원을 찾아서 30년> 등 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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