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좋은 형제’를 찾아서
‘의좋은 형제’를 찾아서
  • 나무신문
  • 승인 2018.03.2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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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충남 예산군

충남 예산군 느린꼬부랑길 1코스 옛 이야기 길을 걸으며

▲ 봉수산자연휴양림에서 본 풍경. 의 좋은 형제 마을과 예당호.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실화였다

▲ 이성만 형제(의 좋은 형제) 효제비

고려시대 전기에 현재의 대흥면 상중리에 이성만 이순 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제는 효심이 지극하고 우애도 깊었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3년 동안 형은 아버지 묘를 지키고 동생은 어머니 묘를 돌봤다. 3년 상이 끝난 뒤에도 형제는 아침은 형의 집에서, 저녁은 동생의 집에서 먹으며 매일 서로를 살피고 도왔다. 음식이 생겨도 형제 중 한 사람이 없으면 먹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까지 전해졌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성만 이순 형제의 이야기가 실리게 된다. 

조선시대 연산군 임금 때인 1497년에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를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이성만 형제 효제비’를 세웠다. 비석은 원래는 가방교 부근에 있었는데,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될 처지가 되자 지금의 자리에 옮겨 세웠다. 

비석에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를 자자손손 영원히 모범되게 하라는 내용의 173자가 새겨져 있다. 

▲ 의 좋은 형제 공원.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형은 아우의 볏단에, 아우는 형의 볏단에, 밤중에 몰래 볏단을 나르다 서로 만나는 내용으로 1964년부터 30여 년 동안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많은 아이들에게 알려졌다.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내려오는 대흥면 상중리 초입에 ‘의좋은 형제 공원’이 있다. 느린꼬부랑길 1코스 옛 이야기 길은 ‘의좋은 형제 공원’ 위에 있는 슬로시티방문자센터 앞에서 시작되지만 ‘의좋은 형제 공원’을 먼저 돌아보면서 효심 지극하고 우애 깊은 형제의 이야기를 새기고 출발하는 게 좋겠다. 

▲ 의 좋은 형제 마을과 예당호
▲ 의 좋은 형제 마을에 그려진 벽화

마을에 전해오는 또 다른 옛 이야기들
예산군 대흥면은 2009년에 슬로시티가 됐다. 마을 안내판에 슬로시티는 그 지역의 자연과 전통문화를 보호하면서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의좋은 형제 공원’과 슬로시티가 잘 어울린다. 공원에서 연자방아 디딜방아 물레방아 등 자연친화적인 생활도구들을 볼 수 있다. 우마차에 탄 어린 형제, 농사일을 하는 형제 등의 조형물이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의좋은 형제 공원’ 앞 도로 가에 비석이 한 줄로 늘어섰다. 예당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된 지역에 있던 비석을 옮겨 놓은 것이다. 1578년에 세운 대흥현감 유몽학 선정비가 가장 오래된 비석이다. 1904년 일제가 조선의 황무지개척권을 50년간 양도하도록 강요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이건하 영세불망비도 있다. 

‘의좋은 형제 공원’을 돌아보고 공원 위에 있는 슬로시티방문자센터 앞에서 출발 한다. 마을길을 지난다. ‘배 맨 나무’ 앞에 도착했다.  

▲ 배 맨 나무

‘배 맨 나무’는 높이 15m 둘레 10m 정도 되는 1000년 넘은 느티나무다. 마을에서 2월 초하룻날과 칠석날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봄에 나뭇잎이 피는 것을 보고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단다. 

마을 옛날 어른들 이야기에 따르면 나당연합군이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임존성을 공격하러 왔을 때 이 나무에 배를 맸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옛날에는 이 나무 부근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임존성은 대흥면 봉수산(483m) 봉우리에 있는 성이다. 둘레가 2.4㎞로 자연지형을 이용해서 돌로 쌓았다. 이 성은 백제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마지막 장소다. 660년 7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되자 흑치상지 등 백제 왕족과 장군 등이 이 성으로 들어와 660년 8월부터 663년 말까지 3년 여 동안 나당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배 맨 나무’를 뒤에 두고 다음 목적지인 봉수산자연휴양림으로 향한다.  

▲ 봉수산자연휴양림 길

대흥동헌에 있는 옛 이야기
봉수산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 앞에 서면 의좋은 형제 마을과 예당저수지가 훤히 보인다. 관리사무소를 지나면 이정표가 있다. 임도·임존성 방향으로 가면 된다. 이정표 방향으로 가다보면 대흥동헌(면사무소)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거기서부터는 그 이정표를 따르면 된다. 시멘트로 포장된 휴양림 임도를 따라 걷는 것이다. 

임도는 마을로 이어진다. 대흥면사무소 부근에 달팽이미술관 건물이 있다. 건물 벽 앞에 대나무로 만든 작은 솟대가 보인다. 솟대 사이에 나무로 만든 노란 의자가 벽에 기댄 것처럼 편하게 놓였다. 솟대는 햇볕을 받아 그림자를 벽에 드리웠다. 

▲ 달팽이미술관 벽
▲ 대흥동헌 뒤뜰에 있는 장독대와 한옥

대흥면사무소 옆에 옛 대흥동헌 건물이 있다. 대흥동헌은 조선시대 태종 임금 때인 1407년에 창건됐다. 1914년 건물을 개조하여 대흥면사무소로 사용하다가 1979년 해체 복원 했다. 예산 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관아건물이다. 

동헌 뒤뜰에는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 화령옹주태실이 있다. 화령옹주는 조선시대 영조 임금의 딸이다. 1752년(영조28년)에 태어나 1821년(순조2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옆에는 옛 집과 작은 연못, 장독대, 아궁이와 가마솥 등이 있다. 드라마 ‘산 넘어 남촌에는’을 촬영했던 곳이다. 

대흥동헌 앞 250년이 넘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하늘로 가지를 펼쳤다. 그 옆에는 ‘의좋은 형제’의 주인공인 이성만 이순 형제를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 연산군 때 세운 ‘이성만 형제 효제비’가 있다. 

▲ 대흥동헌 앞 오래된 나무.

‘장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예산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건 예당저수지 물비린내를 품고 불어오는 바람과 그 바람이 넘실넘실 넘나드는 지붕 낮은 집들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매년 2월 초하루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마을제’를 올린다는 망태할아버지 석상도 엷은 미소로 그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 망태할아버지 석상

예산읍내 장터에 도착했다. 국수가게 앞에 발처럼 드리운 국수가락이 보인다. 햇볕 향기가 국수가락에 스미며 마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국수가락이 봄 물 오른 수양버들 가지처럼 낭창거린다. 국수집에 들러 잔치국수 한 그릇 말아 먹고 장구경에 나섰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이라 장거리가 한산했다. 내복 파는 집 형광등이 파리하게 떨린다. 인기척 없는 골목에 고양이만 어슬렁거린다. 냉장차에서 막 내린 통고기를 손질하는 정육점 아저씨의 굵은 팔뚝만 활기차다. 

▲ 예산시장 주변 골목길 벽화

장터 옆 골목에 있는 채소전 아줌마들과 선술집을 그린 벽화가 옛 예산장터 이야기를 들려준다. 허물어진 흙벽과 낡은 기둥에 의지해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반쯤 허물어진 한옥도 따듯하게 느껴지는 건 이곳이 사람 사는 이야기가 떠다니는 장터이기 때문이다. 

▲ 예산시장 주변 골목길 풍경

장터 주차장 한쪽에 국밥집이 줄지어 늘어섰다. 옛날에는 장이 열리는 날만 문을 열었는데 지금은 장이 열리지 않아도 문을 여는 집도 있다.

방송국 프로그램에 출현한 사진을 상장처럼 내건 국밥집에 앉아 벌건 국물의 국밥 한 그릇을 받았다. 저녁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장에 왔으니 장터국밥 한 그릇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 예산시장 국밥

게으른 해거름에 밖이 훤한데 벌써부터 취한 축도 있다. 혼자 앉아 연신 숟가락질을 하던 사내는 대구에서 대전으로 가는 길에 이집 국밥을 먹으려고 일부러 들렀다는 말로 내게 인사를 대신하며 말을 건넨다. 맛을 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말로 화답을 하는데 주인아줌마가 밥 더 필요하면 말하라며 말을 보탠다. 국밥 맛도 맛이지만 장터 분위기 물씬 풍기는 사람들이 있어 장터국밥 맛이 산다. 

▲ 예산시장 국수집에서 뽑은 국수로 잔치국수를 만들었다.
▲ 예산시장 국수 말리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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