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겨울이야기는 바다에서 끝을 낸다
여행/겨울이야기는 바다에서 끝을 낸다
  • 장태동
  • 승인 2007.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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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야기는 겨울바다에서 시작되거나 또 거기에서 끝난다. 바다가 세상의 끝이자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인 것처럼, 겨울바다는 백사장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사연들이 쌓이거나 부서지는 곳이다.

야윈 ‘겨울강’이 시린 등 뒤척이며 바다로 흐를 지라도 청춘의 추억을 찾아 겨울바다 앞에 선 발자국은 따듯할 것이다. 아프면 아픈 대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아무것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대로 언제나 겨울바다는 비우거나 채우라 한다. 

포항시 남구 하정 삼거리에서 양포방면으로 4킬로미터 정도 가다보면 구룡포읍 구평1리가 나온다. 큰 도로에서 마을 쪽으로 들어오는 길로 접어들면 구불거리는 언덕 비탈길이다. 언덕에서 보면 저 멀리 먼 바다부터 가까이 갯바위에서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비탈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있다. 바다와 마을을 갈라놓은 것은 어항을 따라 완만하게 곡선을 이룬 마을 앞 도로. 물결 거센 날 마을로 들이치는 파도를 막기 위해 도로와 바다 사이에 방파제를 만들어 놓았다.

언덕에서 불어닥치던 바람같이 거칠 지는 않지만 마을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겨울답다. 바다는 마을로 들어와 부채처럼 펼쳐져 있다. 바람이 이는 부채의 끝을 따라 걸었다. 바닷바람 걸러 낼 나무 한 그루 없는 마을. 귓불을 스친 바람이 어느새 언덕을 타고 올라 마을 뒤 숲을 흔든다. 그렇게 한차례 큰 바람이 휩쓸고 간 바다는 얼마 동안은 잔잔해 질 것이다.
사람 사는 일도 다르지 않아서, 젊은 시절 활화산처럼 터져 올랐던 일들이 이제는 주점 한 귀퉁이 술상을 채우는 추억의 조각이 돼버렸다. 자물쇠 굳게 걸린 마음의 구석방 어둠 속에 젊은 날의 꿈이 잉걸불로 남아 꺼지지 않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우리는 습관처럼 추억에 기대어 흐린 날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갔던 길 다시 걸어 나오며 바다를 본다. ‘파란 하늘과 바다’보다 ‘눈 오는 바다’를 기다린다. 굳게 걸린 마음의 방 자물쇠를 열고 은근하게 빛나는 잉걸불을 꺼내 눈 내리는 겨울 바다 앞에 보이고 싶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는 거라고 바다는 내게 말해 줄 것이다. 구평리 바다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를 기다리기에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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