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노래
끝나지 않은 노래
  • 나무신문
  • 승인 2018.03.2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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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충북 진천군
▲ 보탑사 사천왕문에서 본 느티나무.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수령이 360년이 넘었다.

충청지방 눈 소식을 접한 2월 어느 날 충북 진천으로 발길을 놓았다. 눈 녹아 비 된다는 우수가 지나서인지 눈 녹은 땅이 질척거리며 숨구멍을 틔우고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녹아 이슬처럼 맺힌다. 복수초 개화 소식이 먼 곳부터 들리니 이제 온 땅을 뚫고 새 생명이 솟구쳐 피어날 것이다. 봄소식을 기다리며 도착한 진천에서 봄을 기다리는 끝나지 않은 노래를 들었다.   

▲ 길상사

보탑사 길상사
진천군 서쪽 끝에 있는 작은 절, 보탑사로 가는 길에 신라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곳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였다. 김유신 장군 생가 터를 알리는 안내판과 비석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뒷산에 김유신 장군의 태실이 있다. 

▲ 김유신 장군 탄생지

김유신 장군 유적지를 뒤로하고 보탑사로 가는 길에 연곡저수지의 고즈넉한 풍경이 여행자를 반긴다. 연곡저수지를 지나 보탑사에 도착했다. 

보탑사 앞 커다란 나무가 가지를 다 드러낸 채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360여 년 된 느티나무다. 

보탑사는 고려시대에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곳에 현대에 지은 절이다. 경주 황룡사구층목탑을 따라 지었다는 절 마당 가운데 있는 거대한 삼층목탑이 인상적이다. 그 뒤에 오래돼 보이는 삼층 석탑이 있다. 

절 마당 한쪽 옆에 비각이 보인다. 진천 연곡리 석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이다. 진천 연곡리 석비는 거북받침 위에 비 몸을 세우고 비 머리를 얹은 비석이다. 비석에 글자 한 자 새기지 않아서 ‘백비’라고 불린다. 보물 제404호다. 

▲ 길상사에서 본 진천읍

작은 절을 돌아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눈이 햇살에 녹는다. 절집 기와에서, 나무 위에서 녹은 눈이 물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겨우내 얼었던 절 마당 흙도 녹아 숨구멍을 틔운다. 새 봄에 새 생명이 움틀 자리다. 겨울과 봄이 같은 시공간에 머무르는 계절, 계절이 바뀌는 하늘에 기상 높은 파란 하늘이 열렸다.  

보탑사 앞 느티나무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가는 길, 김유신 장군 탄생지를 지나 김유신 장군 사당인 길상사로 향했다. 길상사는 진천읍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길상사는 신라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신라시대부터 사당을 세우고 봄과 가을에 제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길상사를 불태웠다. 조선시대 철종 임금 때 죽계사를 지어 제사를 다시 지내기 시작했다. 지금의 길상사는 1926년에 지은 것이다. 1959년 개축하고 1975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김유신 장군은 진천에서 태어났다.  

을사늑약, 그리고 헤이그 특사
진천읍내를 지나 도착한 곳은 이상설 생가와 사당이 있는 산척리 마을이었다. 평범한 시골마을에 있는 초가 한 채가 인상적이었다. 

나라의 운명을 등에 지고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해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으로 향하던 이상설의 마음은 어땠을까?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식민지가 분할되던 그때, 무력을 앞세운 일제의 강압적이고 부당한 침탈에 맞선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충북 진천 이상설 생가에서 우리의 봄을 생각해 보았다. 

▲ 이상설 생가 터에 복원한 초가

1904년에 발발한 러시아와 일본 간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미국과 은밀한 조약을 추진하고 있었다.

1905년 7월 일본 도쿄에서 일본의 카쓰라 다로와 미국의 윌리엄 태프트가 만났다. 둘은 하나의 조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것을 서로 인정하자는 내용이었다. 조약은 두 나라 최고통치권자의 승인으로 그해 8월 완성되었다. 이른바 ‘카쓰라 태프트 밀약’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영국과도 동맹을 맺고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동의를 얻게 된다.  제국주의 서양 열강의 동의를 얻은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식민지로 만들려는 음모에 박차를 가한다. 

▲ 이상설 생가. 탱자나무 울타리가 인상적이다.

‘카쓰라 태프트 밀약’이 체결된 그해에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이른바 ‘을사늑약’을 진행했다. 1905년 11월18일 새벽 2시 경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을사늑약’은 일본의 무력에 의한 강압 속에서 절차와 형식 없이 진행된, 국제법상으로도 원천적인 무효 조약이었다. 

‘을사늑약’을 인준하지 않은 대한제국 고종은 일본의 무력적이고 강압적인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는 노력에 힘을 기울였다. 그중 하나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냈던, 이른바 ‘헤이그 특사’ 파견이었다. ‘헤이그 특사’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명이었다. 

이상설은 1906년에 대한제국을 떠나 북간도 용정에 있었다. 1907년 서울을 떠나 부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준은 그곳에서 이상설과 만난다. 둘은 러시아 이르쿠츠크와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이위종과 합류했다. 세 명의 특사가 헤이그에 도착한 건 6월25일 이었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진행 중이었지만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을사늑약’을 이유로 주최 측은 대한제국 특사의 회의 참석권과 발언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명색은 만국평화회의였지만 이미 세계질서를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던 제국주의 열강, 그들만의 리그였다.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주권을되찾으려고 했던 ‘헤이그 특사’의 임무는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진행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러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서로 인정한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거대한 야욕 앞에서 대한제국 헤이그 특사의 뜻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 보탑사 삼층목탑

헤이그 특사 이상설, 그의 생가를 찾아서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이었던 이상설은 충북 진천군에서 태어났다. 1894년에 과거 문과에 급제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 됐다. 당시 조정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이상설은 일제의 강압적인 제지로 조약을 맺는 장소에 발도 붙이지 못했다. 

이상설은 일제의 무력 앞에서 강압적이고 부당하게 진행된 ‘을사늑약’을 파기해야 한다는 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거리에 모인 청중들에게 항쟁으로 맞서야 한다는 연설을 펼치기도 했다. 끝내 자결의 길을 선택하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이상설은 북간도 용정으로 터전을 옮겨 서전서숙을 세워 교육에 힘썼다.  

▲ 이상설 생가 터에 복원한 초가와 이상설 상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는 이상설이 태어난 곳이다. 광복을 전후해서 무너진 이상설 생가를 복원했다. 탱자나무 울타리 작은 초가집이다. 햇볕이 고이는 마당을 지나면 이상설의 상이 있다. 1997년에 진천읍 교성리에 있었던 숭렬사(사당)와 숭모비도 생가 옆으로 이전했다. 

무력을 앞세운 일제의 강압적이고 부당한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자결까지 시도했던 이상설,나라의 운명을 등에 지고 시베리아 대륙을 가로질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이상설, 서전서숙을 세워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들에 대한 교육사업에 앞장섰던 이상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의 뜻은 지금도 살아 있다.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그가 태어난 초가의 마당에 고인 봄햇살처럼 끝나지 않은 노래는 계속 되고 있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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