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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산 아랫마을

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서울시 강서구 나무신문l승인2018.01.18l수정2018.01.1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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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산 소악루에서 본 한강

한강, 빌딩숲에 가려진 아름다운 여행지다. 수질오염과 둔치개발로 인해 큰 물줄기가 품고 있는 자연스러운 매력이 반감 됐다. 

백사장의 은모래와 수양버들이 어울린 한강에 나룻배 한 척이 강을 건너는 풍경을 생각만 해도 그럴 듯하다.  

겸재 정선의 그림 속 한강과 궁산은 아름답다. 뒷개, 옛 나루에 떠 있는 작은 배는 사라진 지 오래다. 산을 깎아 공장을 만들었다. 공장 터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서울시 강서구 궁산은 한강 가에 있는 해발 74m의 낮은 산이다. 산 둘레에 난 약 1.6㎞의 둘레길을 따라 걷다보면 소악루, 성황사, 양천고성지, 양천향교 등을 볼 수 있다. 산 정상은 통일신라시대 성터였다. 

▲ 궁산 소악루에서 본 북한산

궁산 기슭 뒷갯말
고구려시대에 제차파의현, 신라시대에 공암으로 부르다 고려시대에 양천현이 됐는데 조선시대에도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서 쓴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 나온다. 그곳이 지금 서울시 강서구 마곡동과 가양동에 걸쳐 있는 궁산 아래 현아를 두었던 양천현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현(현아) 동쪽 11리(약 4㎞)에 양화도가 있고, 서쪽 11리에 김포가 있고, 남쪽 15리(약 6㎞)에 금천이 있으며, 북쪽으로 1리(약 400m)에 한강이 있다. 양천현의 현아는 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239 일대에 있었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이 1797년에 양천현아에 들렀을 때 남긴 시 한 편이 지금도 전해진다. 

한강 가을 물결 무명베를 펼쳐 놓은 듯/무지개다리 밟고 가니 말발굽 가볍다./사방 들녘 바라보니 누런 구름 일색인데/양천 일사에서 잠시 군대 쉬어간다. 

▲ 궁산 숲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는 새들

세종실록에 현의 북쪽에 주산석성(主山石城)이 있다고 나오는데 그 성이 궁산에 있는 성이다. 현재 궁산 정상에 둘레 200m 가량의 평지가 있는데, 그곳이 옛 성터 자리다. 이 지역 발굴 당시 통일신라시대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나왔고 한다. 강 건너 행주산성과 파주의 오두산성 등과 함께 한강 어귀를 지키는 중요한 성이었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물리친 권율 장군이 궁산에 있는 성에도 머물렀었다고 한다. 행주산성에서 남동쪽으로 약 2.8㎞ 거리에 있는 성이었으니 행주대첩 당시 이 성의 역할도 중요했으리라 짐작해본다. 

강서06 마을버스 종점이 궁산 북서쪽에 있는 마곡동 벽산아파트다. 종점에서 내려 버스 진행방향으로 더 들어가면 막다른 길이다. 그 넘어 한강이 있다. 

옛날 이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뒷개라고 불렀다. 뒷개는 나루였다. 마을 뒤(궁산 넘어 북쪽)에 있었다고 해서 뒷개라고 불렀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자연스럽게 뒷갯말이 됐다. 뒷개를 한자로 바꿔 쓰면 후포가 된다. 

일제강점기에 후포리와 마곡리를 합쳐 마곡리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금까지 관할 행정구역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지금의 강서구 마곡동이 됐다. 벽산아파트 입구 부동산업소 벽에 붙은 관내 지번 지도에도 ‘후포’라는 지명이 한강 가에 표기 됐다. 

▲ 양천향교
▲ 향교 한옥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돌산에서 아파트 단지로
마을 주민을 만나 마을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 아파트가 완공 됐다. 현재 아파트 단지 자리에 화학약품을 만들던 공장이 있었다. 그가 30대에 그 공장에서 일했다. 지금부터 40~50년 전 일이다. 염산과 액체염소 등을 만들었었는데 공장에서 사고가 나면서 공장은 문을 닫았다.  그 다음에는 전자제품에 관련된 것을 만드는 공장이 들어섰었는데 오래 가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됐다. 그리고 지금의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산을 깎아 화학약품 공장을 만들 당시에는 궁산 기슭에 집이 많지 않았다. 길도 지금처럼 나있지 않았다. 현재 마을버스가 오가는 길도 없었다. 새 길이 생기고 옛 길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그 시절 장마철이면 한강물이 불어 지금의 아파트 단지 상가 앞에 있던 집 마당까지 들어찼다. 

궁산의 왼쪽이 마곡동이고 오른쪽이 가양동이다. 마곡동 일대는 논농사를 짓던, 서울에 남아 있는 마지막 평야였다. 가양동도 논이 많았는데 한강 일대에는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이 일대가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이 반반이었다고 나온다. 벼농사와 함께 조, 기장, 피, 콩, 수수, 팥, 녹두, 메밀 등 다양한 곡물을 재배했다. 삼(마) 농사도 지었는데 현재 동 이름인 ‘마곡’은 삼(마)이 많이 났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 양천 고성지.

겸재 정선
강서06 마을버스 종점 벽산아파트 뒷산이 궁산이다. 종점에서 궁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궁산에서 보는 한강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옛 사람들은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 놓고 놀았다.  

조선시대 영조 때 동복현감을 지낸 이유가 지은 소악루는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궁산을 찾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소악루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산6-4 근처로 추정하고 있지만 주변 환경 변화가 많아 자세한 위치는 모른다. 1994년에 지금의 위치에 지었다. 

▲ 소악루.

당시에 소악루에 오르면 굽이치는 한강 물길과 함께 안산(서대문구에 있는 산), 인왕산, 남산, 관악산 등이 보였다고 한다. 지금은 지형이 바뀌고 도심에 건물이 들어서서 옛 풍경을 그대로 볼 수 없다. 

소악루에서 부근에 성황사가 있다. 성황사는 성황사신을 모신 묘당이다. 성황사신은 여신으로, 이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성황사신을 도당할머니로 모시고 있다.

▲ 양천 고성지에서 본 한강

조선시대 사람 겸재 정선의 그림 속에서 궁산과 궁산에서 보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겸재 정선은 1740년부터 1745년까지 양천 현령을 지냈다. 지금 같으면 경로우대를 받을 나이인 65세에 정선은 현령으로 부임하면서 5년 동안 그의 재주인 그림 솜씨를 발휘해 궁산과 한강 등 주변 풍경을 그렸다. 

‘안현석봉’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은 정선이 궁산에서 강 건너 안현(지금의 서대문구 안산)에 피어난 봉화불을 보고 그린 그림이다. ‘소악후월’은 궁산에서 바라본 한강에 달 뜨는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궁산 아래 2009년에 개관한 겸재정선미술관이 있다.

▲ 겸재 정선 미술관.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나무신문  imwood@imwoo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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