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여울마을에서
가래여울마을에서
  • 나무신문
  • 승인 2018.01.05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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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서울시 강동구

2018년은 가을의 큰 산 같은 해다. 우거진 숲의 신성함이 말없이 듬직한 가운데, 꺼지지 않는 촛불이 사람들 마음에 하나씩 불을 밝혀 마음 착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가래여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순해진다. ‘가래’란 가래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고, ‘여울’이란 말 그대로 강물에 산소를 공급해서 생명들을 더 건강하게 살게 하는 그 여울이다.

‘가래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서울에 있다. 가래여울마을은 굳어가는 서울에 숨을 불어 넣는 마을이다.    

▲ 가래여울마을. 마을과 한강 사이에 자전거길이 생겼다

마음이 순해지는 이름 ‘가래여울’
가래여울마을로 가기 위해 지하철 5호선 마지막 역 중 하나인 상일동역에서 내렸다. 가래여울마을과 암사동서원마을을 오가는 강동02번 마을버스를 상일동역 주변 버스정류장에서 탔다. 

가래여울마을은 강동02번 마을버스 종점이다. 뿌리에서 길어 올린 수액의 마지막 한 방울이 우듬지 잎사귀 하나까지 생명의 기운을 실어 나르듯 강동02번 마을버스는 사람들을 싣고  가래여울마을로 향한다.  

▲ 강동02 마을버스.

버스는 강일리버파크 아파트 단지를 지난다. 시멘트 시대의 공고함이 수직의 권위와 어울린 경직된 풍경을 벗어나면 넓은 땅 위에 펼쳐진 비닐하우스 단지가 나온다. 흙에서 자라나는 생명이 수평의 안식 위에서 편안해 보인다. 

올림픽대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면 가래여울마을이 나온다. 굴다리가 가래여울마을의 안과 밖을 나누는 상징 같다. 

굴다리를 지나면 착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마을이 나올 것 같았다. 굴다리를 지난 마을버스는 곧 종점에 도착했다. 

▲ 가래여울마을로 들어가는 굴다리.

낭창거리는 수양버들 가지 아래 지붕 낮은 집이 꾸밈없다. 세월의 더께가 오히려 빛나고 있었다. 

마을버스가 닿은 종점마을 이름이 ‘가래여울’인 건 정말 다행이다. ‘가래여울’, 마을 이름을 부를 때도 들을 때도 마음이 순해진다. 

집성촌
마을버스 종점 앞 수양버들이 있는 오래된 집에 가게가 있다. 가게에 계신 분은 오래 전부터 이 마을에 살고 계신 분이었다. 그에게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가래여울마을 가게. 60년 정도 된 버드나무가 이정표처럼 서 있다

서울 동쪽 끝 강동대교 남단 동쪽 올림픽대로와 한강 사이에 자리잡은 가래여울마을은 인근에 있는 능골, 강매터, 벌말, 말우물 등의 자연마을과 함께 강일동을 이루고 있다. 

능골은 청송 심씨 집성촌으로, 50여 가구가 있었는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옛 마을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강매터는 광주 이씨 집성촌이었는데 이곳 또한 개발로 옛 모습이 사라졌다. 가래여울마을은 남평 문씨 집성촌이다. 옛날에는 남평 문씨가 서른 가구 정도 됐었는데 지금은 몇 가구 안 남았다. 

지금은 외지에서 들어온 다른 성씨의 사람들이 많지만 앞뒷집 옆집이 서로 잘 알고 정을 나누고 살던 옛 마을 분위기가 아예 사라진 건 아니다.  

가래여울마을이라는 이름은 가래나무가 많았고 여울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가래와 여울을 하나로 발음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착된 ‘가려울’로도 불렸다. 

▲ 가래여울마을 담벼락과 문
▲ 가래여울마을. 재래식 화장실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 광주목사를 지냈고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이 지금의 가래여울마을에 살면서 마을 이름을 따서 호를 추탄(楸가래나무 灘여울)이라고 짓기도 했다.  마을 이야기를 듣고 마을로 나섰다. 작은 마을 골목을 돌아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골목을 돌아보고 한강이 보이는 자전거길 옆 전망데크에 섰다. 가래나무가 많았다던 강가는 마른 덤불로 가득했다. 잎새 없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은 한 시도 쉬지 않았다. 바람이 낮게 깔려 강을 건널 때에는 강물이 차갑게 떨렸다. 강 건너편 구리시 구리타워가 쌩뚱맞게 보였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가는 자전거 탄 사람들은 이 마을을 아는 지 모르는 지…지는 해 금빛 햇살도 한파에 시리다.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    

▲ 양철 슬레이트 담벼락과 기와지붕

소 끌고 송파장 가던 장길
강 옆, 마을 곳곳에 있었던 가래나무는 지금은 대부분 없어졌다. 마을에 띄엄띄엄 남아 있는 가래나무가 마을 이름의 맥을 잇고 있다. 

마을 앞 강에 있던 여울도 없어졌다. 현재 강동대교가 놓인 곳에 예전에 여울이 있었다. 강동대교 남단이 가래여울마을이고 북단 부근은 경기도 구리시 관할인 돌섬이었다. 가래여울마을 사람들은 걸어서 여울을 건너 돌섬을 오가곤 했다.  

▲ 가래여울마을 앞 한강. 강 건너가 구리시다. 사진 왼쪽 다리가 강동대교다. 옛날에는 강동대교가 지나는 곳에 여울이 있어서 걸어서 강을 건너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 이름에 ‘여울’이 들어간 이유가 옛날 강동대교 자리에 있었던 여울 때문이었다

올림픽대로를 만들면서 강가에 있던 집들은 다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강가에 있던 흙과 모래는 마을 앞을 지나는 올림픽대로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마을의 지형이 바뀌는 일이었다. 

올림픽대로가 생기기 전에 가래여울마을의 백사장은 뚝섬유원지, 광나루유원지와 함께 서울 동쪽의 3대 유원지였다. 하얀 모래밭이 강을 따라 미사리까지 이어졌다. 

반짝이는 백사장 물놀이와 함께 돈을 내고 나무배를 빌려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가래여울마을 앞 한강. 옛날에는 이곳에 백사장이 넓고 길게 펼쳐졌다고 한다

강가 언덕에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던 사람들, 배를 띄우고 배 위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에 지금도 가래여울마을에서 매운탕집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 옛날에 송파장으로 소를 끌고 가던 길.

마을 부근에 나루터도 있었다. 덕소, 금곡, 광주 등에서 우시장이 서는 날이면 소를 사서 배에 싣고 나루터에 내려서 소를 끌고 마을을 지나 송파까지 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들이 쉬어 가는 주막이 있었는데 지금 식당을 하는 감나무집 부근이 주막이 있던 곳이다. 

수양버들이 있는 가게 뒷길이 장을 보러 오가는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어서 ‘장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을에서 논농사와 함께 참외 고구마 농사도 지었다. 농산물을 수확해서 배에 싣고 광진교 아래에 배를 대고 손수레에 짐을 싣고 천호동에 가서 내다 팔기도 했다.  

옛 이야기를 품고 있는 가래여울마을은 마을 앞 아파트 단지와 마을 뒤 한강이 감싸고 있는 섬 아닌 섬이다. 

그 골목 모퉁이, 그 집 담벼락, 그 집 기와지붕에 내려앉은 세월의 더께가 오히려 빛나는 것은 편리와 속도가 선의 잣대가 되는 현대 문명사회에서 사람을 품은 마을, 마을이 품은 사람의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지기 때문이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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