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산성
장미산성
  • 나무신문
  • 승인 2017.12.2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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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충북 충주시
▲ 장미산 정상이자 장미산성 서북쪽 성벽 위에서 본 풍경. 멀리서부터 산줄기가 농담을 달리하며 밀려오는 것 같다.

며칠 째 계속 되는 영하 10도가 넘는 한파도 충주행 발길을 막지는 못했다. 그곳에 장미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미산성은 산성이 품은 역사나 산성에서 보는 풍경으로 치면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다. 

산길에서 만난 두 스님
장미산성, 이름 참 예쁘다. 영토와 사람을 지키는 보루이자 침략의 전초기지, 창칼과 화포가 서로의 심장을 겨눈 전장, 그 한 가운데 자리한 성 이름이 ‘장미’라니!

오랜 옛날 보련이와 장미 남매의 슬픈 전설에서 이름을 따온 장미산성, 산성이 있는 산 이름도 장미산이다. 

충주시내에서 장미산성으로 가는 시내버스가 드물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더라도 산성에서 2㎞ 남짓 떨어진 마을 어귀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걸어야 한다. 노루꼬리 같은 겨울 해를 생각해서 택시를 탔다. 

장미산 아래 마을 별칭이 장미산마을이다. 장미산성으로 가기 위해 599번 도로(첨단산업로)에서 장미산마을로 접어들었다. 마을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승용차 한 대 지날 수 있는 시멘트도로다. 

▲ 장미산 정상이자 장미산성 서북쪽 성벽 위에서 본 풍경

길 옆 응달에 잔설이 남았다. 도로에 녹지 않은 얼음이 박혔다. 장미산성을 500여 미터 앞두고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곳곳에 남은 빙판을 피해 천천히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스님 두 분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 찬 날씨에 여기에 다 오시구…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세요.” 스님은 웃는 얼굴로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 했다. 스님의 말 한 마디, 웃는 얼굴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하며 “아 네 스님, 빙판길 천천히 내려가세요” 했다. 스님 두 분은 비탈길을 조심조심 내려가신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방금 전에 스님에게 한 말이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 손님이 집 마당을 걷 는 집 주인에게 조심하라고 걱정하는 꼴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스님에게 한 말은 내 진심이었다.   

잎새 다 떨어져 가지만 남은 나무가 산골짜기에 가득하다. 신록과 단풍을 다 벗고 꾸미지 않은 채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소쇄하다.  

숨 쉴 때 마다 찬바람이 폐를 찌르는 것 같았지만 상쾌했다. 산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성으로 가는 길목에 봉학사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올라오는 길에 보았던 두 스님이 계신 곳이었다. 

▲ 장미산성 동북쪽 성벽

고구려의 성, 장미산성
충주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이었다. 충주를 가장 먼저 차지한 나라는 백제였다. 백제의 전성기였던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였다. 

다음은 고구려였다. 광개토대왕(재위391~413)은 한강 유역까지 진출했고, 그의 아들인 장수왕(재위 413~491) 때 충주가 고구려 영토가 된다. 

신라는 진흥왕 9년(548년)부터 진흥왕 12년(551년)까지 죽령 이북 10개 군을 차지했는데, 그때 충주는 신라 땅이 됐다.

충주는 세 나라의 전성기 때 각 나라의 땅이 된 것이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충주를 차지한 고구려는 장미산성을 국경의 요새로 만들었다. 장미산성은 신라 진흥왕이 충주를 차지할 때까지 70년간 고구려의 성이었다.    

성의 규모는 높은 곳이 5m, 너비는 5~ 10m, 둘레는 약 3㎞ 정도다. 동북쪽 성벽에 나무 기둥을 여러 개 박아 만든 치성이 발견되기도 했다. 산성은 장미산 정상과 계곡 등 정상부 둘레를 에워싸고 있었다. 지금은 성벽 일부를 볼 수 있다. 

봉학사를 뒤로하고 성곽 위에 난 길로 걷는다. 길이 굽어지는 곳에 의자가 놓였다. 전망 좋은 곳이다.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 없다. 통쾌하다. 얼굴을 에는 칼바람이 오히려 상쾌하다.

남한강을 경계로 동쪽은 소태면, 서쪽은 앙성면이다. 산줄기와 남한강 물줄기가 어울렸다. 겨울산은 힘줄 불거진 팔뚝 같다. 힘이 느껴진다. 산굽이를 따라 구비 돌며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는 평온하다. 강가에, 산의 품에 깃들어 사는 사람 사는 마을이 아늑하다. 

▲ 장미산성 동북쪽 성벽 위에서 본 풍경. 남한강과 소태면 일대가 보인다.

길지 않은 숲길을 따르다 보니 헬기장이 나왔다. 멀리 남한강 물줄기가 햇볕에 반짝인다. 중앙탑이라는 별칭이 더 유명한 충주탑평리칠층석탑이 있는 공원이 손톱만 하게 보인다. 

헬기장을 지나면 장미산 정상이자 장미산성 서북쪽 구역이다. 정상에 커다란 나무가 성을 지키는 장수처럼 버티고 서있다. 이곳에서 보는 전망도 통쾌하다. 정상에서 흘러내린 산자락 끝에 작은 봉우리가 솟았다. 그 위에 충주고구려천문과학관이 보인다. 노은면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겹겹이 겹친 산줄기가 먼 곳부터 농담을 달리하며 밀려온다. 산줄기가 파도가 되고 능선이 물머리가 된다. 

▲ 장미산 정상, 장미산성 서북쪽 성벽 부근에 있는 나무.
▲ 장미산 정상, 장미산성 서북쪽 성벽 위에서 본 풍경. 사진 오른쪽 위에 고구려천문과학관이 보인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 산성 성곽이 보이고 그 뒤로 남한강과 힘찬 산줄기가 만들어 내는 풍경이 펼쳐진다. 낙엽 쌓인 좁은 산길을 조심스럽게 걸어 봉학사에 도착했다. 

전망 좋은 곳에 서서 풍경에 취해 머물렀던 시간까지 다 해서 1시간 정도 지났을까? 정확한 시간을 가늠하지 않았지만, 성곽을 따라, 산길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올라올 때 만났던 스님 두 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텅 빈 산에 혼자였다. 

암자 앞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플라스틱 소쿠리에 곡식 한 줌이 놓여있었다. 햇볕 고이는 곳은 칼바람 한파에도 온기가 서린다. 

▲ 장미산 정상에서 봉학사 방향으로 내려가다 본 풍경

온기 피어나는 한겨울 공설시장  
장미산성에서 내려와 충주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또 다른 흔적, 충주고구려비전시관에 있는 충주고구려비를 보았다. 충주가 고구려의 영토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충주고구려비다. 

충주고구려비를 본 뒤에 인근에 있는 충주고구려천문과학관을 들렀다. 낮에는 해를 관측하고 밤에는 별과 달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둥그렇고 붉은 해의 한쪽에서 불기둥이 솟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홍염이었다. 망원경을 통해 본 불기둥은 쌀 한 톨 정도 크기였지만, 실제로 그 불기둥의 높이는 지구의 지름보다 보다 길다고 한다.

▲ 공설시장 순대와 만두 골목

이러구러 해가 기울고 있었다. 충주에서 오래된 옛 시장, 공설시장으로 향했다. 공설시장 만두를 먹고 싶었다. 충주에 올 때면 웬만하면 공설시장 만두를 먹었다. 겨울 장은 일찍 파할 것 같아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파장 분위기는 아니었다. 

만두와 순대를 파는 십여 개의 가게가 있는 골목을 서성거렸다. 그 골목 대부분 가게의 만두를 맛보았다. 이번에는 안 가던 집에서 먹어볼까? 하다가 미각이 기억하고 있는 맛을 찾아 전에 먹어봤던 집으로 가기로 했다. 2000원에 만두 10개를 준다. 김치 소가 들어간 칼칼한 맛이다. 칼칼한 맛에 입 안이 개운해 진다. 

먼지 묻은 작업복 차림의 사내 몇몇이 순대를 파는 가게에 앉았다. 가마솥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에 그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한 집 건너 앉아 만두를 먹는 내 귀에 그들의 이야기가 흘러든다. 막걸리를 앞에 두고 껄껄 웃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는 그들의 저녁이 따듯하다. 

▲ 공설시장 순대와 만두 골목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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