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비어 가득한 - 공세리성당에서 솔뫼성지까지 걷다
텅 비어 가득한 - 공세리성당에서 솔뫼성지까지 걷다
  • 나무신문
  • 승인 2017.11.29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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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충남 아산시 당진시

충청남도 서북부를 ‘내포’라고 부른다. 내포에는 천주교와 관련된 이야기와 그 증거가 되는 곳이 많다. 천주교 성지와 성지를 잇는 이른바 ‘천주교순례길’도 여러 개 있다. 그 중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에서 당진시 우강면 솔뫼성지까지 잇는 ‘천주교순례길’ 23.8㎞를 걸었다. 

▲ 공세리성당.

가을 물든 공세리성당을 떠나다
공세리성당의 역사는 1890년까지 올라간다. 공세리성당이 있는 땅 이름이 공세곶이다. 공세곶은 조선시대 성종 임금 때인 1478년부터 영조 임금 때인 1762년까지 3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라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던 곳이다. 그 창고에는 충남 일대와 충북의 일부지역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이 모였다. 1762년 공세곶창고가 없어진 뒤 1890년에 성당이 들어선 것이다. 

바닷가 언덕 위에 으리으리하게 들어선 성당은, 지붕 낮은 초가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바라만 봐도 신기한, 경외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평온한 들판, 수평의 세상에 수직으로 우뚝 선 성당은 하나의 권위였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도, 아이들도, 노비도, 백정도 다 같은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그 종교의 이야기는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촛농 녹이듯 녹여 하나로 뭉치게 하고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기원으로 함께 타오르게 했을 것이다. 심지 깊은 불꽃은 죽음으로도 꺼뜨릴 수 없는 신념이 되기도 했다. 

그 종교의 이름으로 내세운 사랑과 평화가 이 땅에서 퍼지던 때, 그때 들어온 그들 세상의 총칼과 대포, 전함의 함포는 이 땅을 유린했다. 갯벌에서 조개 줍고 들판에서 허리 굽혀 일하며 초가지붕 둥근 박처럼 살던 이 땅의 순박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사랑과 핍박은 공존했고, 전쟁과 평화는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 있었으며, 소외되고 핍박 받던 사람들은 그 안에서 죽어갔다. 

고목의 단풍으로 고풍의 옷을 차려 입는 공세리성당을 뒤로하고 23.8㎞ 밖에 있는 당진시 우강면 솔뫼성지로 향하는 첫 발을 내딛는다. 

▲ 빈 들이 가득하다.

빈 들녘이 먹먹하다
돈부리들을 지나 양원들로 가는 길은 너른 들판을 지나는 농로다. 논을 가득 메웠던 벼가 한 포기도 없다. 잘린 포기의 밑동은 세 계절을 살아낸 생명의 바다를 상징하기에 충분했다. 생의 흔적들이 너른 들판에 가득하다. 맺히고 자라고 영글어 가던 생명의 이야기가 지금도 그 들판 위 공중에서 자맥질을 하는 것 같다. 텅 빈 들녘이 먹먹하다. 

걸매리 굴다리를 지나면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바다와 내륙 깊숙한 곳에서 흘러온 강이 만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수원, 오산에서 흘러드는 물길이 안성, 평택을 지나온 물길과 만나 안성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다 아산만방조제를 만나 아산호로 고였다가 서해로 흘러 바다가 된다. 천안, 아산, 예산, 홍성, 당진에서 흘러드는 물길이 모여 흐르는 삽교천은 삽교천방조제를 지나 바다를 만난다. 

▲ 삽교천방조제 오른쪽에 펼쳐진 풍경.

아산만방조제를 뒤에 두고 삽교천방조제 쪽으로 걷는 것이다. 오른쪽 멀리 서해대교가 아른거린다.   

물 빠진 바다가 빈 들녘 같다. 갈매기는 높이 날지 못하고 자꾸만 뻘 바닥에 내려앉는다. 줄지어 박힌 막대기에 그물이 매달렸다. 찢어져 너덜거리거나 줄만 남은 것도 보인다. 작은 고깃배가 기우뚱 누워 배를 드러내고 있다. 삽교천방조제가 끝나는 소실점에는 대관람차가 한물 간 여행지의 관록을 말해주고 있었다. 

모든 것이 때가 있다면, 아마도 이 풍경은 철 지난 계절에 하나 둘 씩 사라지는 추억일 것이다. 

삽교천방조제 중간에서 아산시 인주면과 당진시 신평면이 만난다. 한 발 짝에 아산시에서 당진시로 넘어갔다. 

▲ 삽교천방조제 왼쪽으로 펼쳐진 풍경.

삽교천방조제에서 삽교배수관문으로 가는 길이 공사 중이다.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걸어갈 수 있는 인도가 없어졌다. 삽교배수관문이 바로 앞인데… 난처했다. 

삽교천방조제만 3㎞ 길이다. 시내버스를 타려면 걸어왔던 삽교천방조제를 고스란히 다시 걸어서 되돌아가서, 시내버스정류장이 있는 아산시 인주면소재지까지 2㎞ 정도를 더 가야 한다. 

▲ 삽교천방조제.

자동차 바퀴가 도로 표면에 마찰되는 소리가 깨진 면도날처럼 날아와 고막을 찌른다. 현기증이 일었다. 방조제에 막힌 민물의 영역, 삽교호와 물 빠진 텅 빈 바다를 번갈아 보며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공사현장과 도로를 나누는 간이 담장 옆으로 바짝 붙어 걸었다. 나를 발견한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며 총알처럼 지나간다. 오가는 차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삽교배수관문을 지나 삽교호관광지에 도착했다. 가을볕에 살이 익었다. 시원한 맥주로 열기를 식히고 칼국수 한 그릇으로 배를 채웠다. 이제 반 정도 온 셈이니, 앞으로 갈 길이 반이다. 

▲ 삽교천방조제 중간이 아산시와 당진시의 경계다.

삽교호관광지에서 솔뫼성지로 가는길은 신평면 운정리, 우강면 부장리, 신촌리, 강문리를 지나 송산리 솔뫼성지로 이어진다. 

너른 들판 가운데 마을이 띄엄띄엄 놓였다. 지붕 낮은 집들은 수평의 평온함을 거스르지 않는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굴뚝 연기도 공중에서 흩어져 들녘을 덮으며 넓게 퍼진다. 나무 타는 향기가 들녘에 난 실 같은 길까지 번진다. 오후의 햇살이 연기 사이로 퍼져 논바닥에 가라앉는다. 

돌미륵이 있는 마을도 지나고, 비닐하우스 비닐이 깃발처럼 날리는 마을도 지나고, 흙먼지 날리는 시냇가 흙길도 지나고… 나이든 엄마를 모시고 해거름 논둑에서 허리 굽혀 일하는 아저씨의 머리카락도 희끗희끗 했다.

솔뫼성지 위 하늘에 노을이 피어나다
곧게 뻗은 농로 끝이 솔뫼성지가 있는 송산리 마을이다. 해지는 들녘의 저녁 공기는 보랏빛 머금은 파란 색으로 변한다. 마을로 들어서는 발길이 급했다. 소나무 숲이 솔뫼성지 담장 넘어 보였다. 

▲ 솔뫼성지 하늘 위에 노을이 피어난다.

소나무 숲이 있어 ‘솔뫼’라 했겠지! 솔뫼성지 담장을 따라 걷는다. 오늘 하루 걷기로 했던 길, 23.8㎞의 도착지점에 도착 했다.    

솔뫼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이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집 터가 솔뫼성지 안에 있다. 그 터에 집을 다시 지었다. 김대건 신부 집안은 4대에 걸쳐 천주교 신앙을 가졌던 집안이었다. 

▲ 솔뫼성지.

1846년에 서울 새남터(현재 한강대교 북단 서쪽 한강둔치와 기찻길이 있는 언저리. 당시 새남터는 처형장이었다)에서 순교했다. 

솔뫼성지는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동상과 순교기념비 등을 세우면서 성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솔뫼성지는 국가사적지 제529호다. 

▲ 솔뫼성지.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터.

성지 안에 있는 작은 소나무 숲을 거닐다 가지 사이로 비치는 노을빛을 보았다.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의 조형물이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노을빛이 하늘에 가득했다. 텅 빈 하늘에 가득한 건 노을빛만은 아니었다.  

▲ 빈 들판 전봇대.
▲ 시골 버스정류장.
▲ 신평리 돌미륵.
▲ 흙길과 시냇물이 흐르는 풍경 속을 걷는다.
▲ 파란 하늘 아래 지붕 낮은 집들이 순하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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