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나만의 맞춤 가구를 만든다
스토리가 있는 나만의 맞춤 가구를 만든다
  • 황인수 기자
  • 승인 2017.11.08 1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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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오테르가구 권진용 대표
▲ 권진용 대표

[나무신문] 최근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오테르가구. 성공한 마케터에서 가구 디자이너로 변신, 개인별 맞춤 가구를 제작하며 작가주의 마케팅 전략으로 가구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오테르가구의 권진용 대표를 하남시 오테르가구 전시장에서 만났다.  <편집자 주>

가구대리점, 가구공업협동조합 사업단장, 가구회사 (주)가보로, (주)신화퍼니처 등 가구와 관련된 사업을 해 오셨다. 가구와 인연을 맺은 특별한 계기가 있나?
가구와의 인연은 우연치 않게 찾아왔다. 난 강원도 홍천 화전민촌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부터 버스 터미널에서 주간지를 팔았다. 아이스케끼와 하드를 팔고 구두를 닦은 돈을 모아 등록금을 냈다. 그렇게 해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내 뜻과는 달리 인제농고에 입학했다. 전교회장을 하면서 공부했지만 대학을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서울로 와서 다시 책을 팔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판매한 책이 ‘뛰면서 생각하라’라는 대만작가 어목덕근의 책이었는데, 판매원 14명 중 내가 가장 많이 팔았다. 그러다가 일반 서적보다는 브리테니커 사전을 팔기 위해 견습사원으로 들어가 영업하다가 학원을 방문하게 됐는데, 그 학원 원장이 책 팔지 말고 자기 학원에 와서 중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쳐 보라고 했다. 그래서 학원 강사를 했다. 중학교 때부터 과외를 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군대 갔다 와서 다시 학원 강사를 하려고 했지만 내 학력으로 남을 가르친다는 게 왠지 내키지 않았다. 동부건설 해외사업부 사원모집에 입사 지원을 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 투입, 4년 6개월 동안 근무했다. 이때까지도 내 인생이 가구와 연결될 거라는 걸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우디아라비아 근무 후 귀국해서 무슨 일을 했나?
곧바로 귀국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한 결과 당시 서울에서 집 몇 채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었다. 특히 남들이 꺼리는 일요일 근무를 대신 해주고 받은 돈도 꽤 많았다. 이 돈으로 뉴욕행 비행기표를 샀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뉴욕시립대 교수의 만류로 공부보다는 사업의 길을 택하기로 하고 32일간의 해외 배낭 여행을 감행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대우전자 대리점을 시작했다. 하지만 전자제품 대리점에 대한 본사의 운영방식과 체제에 문제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다시 자금을 회수할 수 없을 때였다. 그래서 제2의 사업을 준비하기로 하고 대리점 옆에 가구대리점을 차려 두 점포를 함께 운영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우전자의 부도로 큰 타격을 입게 됐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고생하고 있지만, 가구점 운영으로 만회하고 있다. 

가구대리점을 운영하면서 경영학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동기는?
가구에 대해 좀 더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경영을 잘 하려면 마케팅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통대를 거쳐 성균관대학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마케팅 과정을 마쳤다. 가구 대리점의 경영능력과 마케팅 실력을 인정받아 한국가공업협동조합의 설립과 운영에 관여하게 됐고, 가구학회 이사 겸 부회장으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52세 때 가구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좀 긴 에피소드가 있다.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국내 가구제조업체 52개사가 공동투자해 설립한 (주)가보로의 공동대표직을 내려놓으면서 가구디자이너가 돼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한양대 대학원 가구디자인 과정에 입학했다. 늦은 나이였지만 오로지 열정 하나로 그 길을 선택하고 버텼다. 그래서 지금의 오테르가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주)가보로는 어떻게 왜 설립된 것인가?
가구 및 패션산업은 언더마켓이 70%를 차지한다. 특히 가구는 중국, 대만 등 해외로부터의 수입이 90%를 차지할만큼 해외의존성이 크다. 이 말은 우리나라 가구 업체 및 산업이 열악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금이 부족한 가구업체들이 이태리나 독일산 기계를 살 수 없어 모든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생산성이 떨어지고, 그것은 곧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 나라에서 해외의 첨단 기계를 확보해 가구공장에 렌탈해 주면 제조비용이 낮아지고 납기를 단축할 수 있어 충분히 중국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디자인 능력은 중국보다 우수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으로 우리만의 자체 브랜드, 자체 모델을 만들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설립한 공동회사가 바로 (주)가보로이고, 나와 서울가구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이 이 회사의 공동대표가 됐다.
가보로가 설립된 첫해에 106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리고 투자 회사도 68개사로 늘었다. 대만에서 (주)가보로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대표직을 내려놨고, 이것을 계기로 가구디자이너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때 내 나이가 52살이었다.

상까지 받으신 걸로 알고 있다.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면서 ‘서울시국제공모전’에 응모했다. 젊은 작가들도 입선하기 힘들다고 하는 상을 받으니 너무 뿌듯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시상하면서 ‘이렇게 나이 많은 디자이너에게 상을 주는 일은 처음’이라면서 격려해 줬다.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세계디자이너총회’에서도 공동 우수상을 받았다.

대학 강의는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
여러 대회에서 상을 받고 디자이너로서 이름이 알려졌다. 그리고 석박사 과정을 거치고 나니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한양대학교와 호원대학교에 겸임교수로 임명돼 ‘현대건축디자인’과 ‘가구디자인’에 대해 강의했다.

신화전기와의 만남이 가구디자이너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2013년 신화전기와 함께 (주)신화퍼니처를 설립해 대표이사로 활동하면서 또한 가구 디자이너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신화퍼니처를 접고 오테르가구로 독립해 나만의 가구, 개인별 맞춤 가구를 만들고 있다.

오테르는 어떤 가구를 추구하는가?
‘Auteur’는 프랑스어로 ‘창조자, 발명가’라는 뜻이다. 획일적인 디자인에서 벗어나 개성 있는 가구, 유럽의 공방처럼 장인정신으로 작품 하나하나 정성들여 만드는 가구라는 의미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동안 경영인으로서, 디자이너로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녹여내어 합리적인 가격에 품질, 디자인 어느 하나 놓치지 않는 가구 브랜드로 키워나가기 위해 오테르가구라  이름을 지었다. ‘오테르’는 나의 디자인이 녹아든 브랜드다.

오테르가구만의 특징이라면?
오테르가구는 사용자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스토리와 패턴을 추구한다.

확실한 모티브를 갖고 제작하며 사람한테 해롭지 않은, 천연소재의 사용을 원칙으로 한다. 일반 소재를 사용하더라도 간결한 디자인으로 풀어내는 가구로 실용성, 디자인, 색상 등을 만족시키는 가구를 지향한다. 획일적인 가구가 아닌 작가주의적, 고객맞춤형 제작 가구. 이것이 곧 오테르가구의 특징이고 목표다.

앞으로의 계획 또는 꿈이 있다면?
가구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회사를 경영하니 원목의 선별, 공정과정, 디자인 등 전 제작과정을 꿰뚫게 되어 원목의 특징을 살린 독특한 디자인, 더욱 튼튼한 가구를 만들 수 있게 됐다. 같은 원목이라도 어떻게 제작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이 원목가구의 매력이다. 고민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시대의 변화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 더 노력해서 ‘샤넬’과 ‘루이비통’과 같이, 또 ‘아르마니’, ‘페라가모’와 같이 내 이름으로 만든 오테르가구가 국내를 넘어 세계시장에서 당당히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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