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마을 - 정지용 시인이 살았던 집터
시인의 마을 - 정지용 시인이 살았던 집터
  • 나무신문
  • 승인 2017.11.0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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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서울시 은평구, 부천시 소사구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소사본동. 정지용이 살던 집터.

가을이 깊어지면 누구나 시인이 되는 것 같다. 나를 돌아보고,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회환과 반성의 시간이 깊어진다. 도시의 뒷골목 구석진 곳으로 쓸려가는, 먼지와 뒤엉킨 낙엽에서 나를 보기도 한다. 얼마나 더 쓸쓸해져야 그리운 것들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시를 읽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움츠린 등이 오히려 따듯하다. 그 마음으로 시인 정지용의 시를 들추며 그의 흔적을 찾아가 본다. 

마지막 거처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126-10. 이곳은 시인 정지용이 1948년부터 1950년 납북되기 전까지 살던 집이 있었던 곳이다. 

정지용이 살던 집은 ‘ㄱ’자 형태의 6칸 초가였다. 정지용은 녹번동으로 이사하기 전인 1947년에 경향신문사를 그만두었고, 1948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에서도 물러났다. 사회활동을 그만둔 그는 녹번동 초가에서 시를 쓰고 서예를 즐기며 살았다. 

녹번동은 당시에는 녹번리였다. 정지용이 녹번리 초가에 살면서 쓴 시 가운데 ‘녹번리’라는 시가 있다. [헐려 뚫린 고개/상여집처럼/하늘도 더 껌어/쪼비잇 하다.]-‘녹번리’ 중 일부- 어느 날 술 취한 정지용이 녹번리 초가로 가는 길목에서 그런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소사본동. 정지용 시인이 3년 동안 살던 집터.

정지용이 살던 집은 사라지고 그 터에 빌라 건물이 들어섰다. 조용한 주택가 골목 빌라 벽에 정지용이 살았던 곳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있다. 표지판 위에 ‘우리 동네는 은평 귀가 길에 시 한 편 읽고 가는 동네’라는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가 걸렸다. 

마을 주민이 기증한 긴 의자가 빌라 앞 전봇대 옆에 놓여 있다. 전봇대에는 정지용의 시 ‘고향’이 적힌 인쇄물이 걸려있다.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 대한민국 문학사에 거목으로 남은 시인들을 등단시킨 사람이 정지용이었다. 일상의 말들이 시에서 어떻게 빛나는 지, 전통의 정서가 구태를 버리고 현재에 어떻게 발현되는 지, 모국어가 어떻게 더 깊고 새로워지는 지… 정지용이 살았던 집터 앞에서 그를 생각하며 서있었다.   

▲ 정지용이 살던 은평구 녹번동 집터. 당시에 6칸 초가에 살았다고 한다.

시인의 고향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과 후배, 고향 사람들이 뜻 모아 만들어 놓은 생가, 시비, 기념비, 동상, 문학관 등 옥천에는 그의 흔적들이 많이 있다.

그중 국내에서 처음 세워진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옥천체육공원에 있다. 1989년 건립된 이 시비는 턱 낮은 기단 위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시비로 쓰인 돌은 속리산 계곡을 대여섯 달 훑고 다니면서 찾은 것이다. 시인의 생가는 가족과 이웃 주민들의 고증을 통해 1996년에 옛 모습과 흡사하게 복원 했다.  

정지용은 1918년 서울에 있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고향에서 살았다. 정지용문학관 자료에 따르면 정지용은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23년 일본 동지사대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29년 귀국해서 휘문고보에서 교편을 잡고 서울 효자동에서 살기 시작했다. 노래로 만들어져 이른바 ‘국민시’가 된 ‘향수’는 1927년에 발표됐으니 아마도 일본 유학 시절에 고향을 생각하며 쓴 시가 아닐까?   

▲ 정지용이 살던 은평구 녹번동 집터 앞 전봇대에 정지용의 시 _고향_이 붙어있다. 그 옆에 주민들이 기증한 의자가 놓여 있다.

정지용의 시 ‘향수’ 1연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정지용의 시 ‘향수’ 1연. 민음사에서 출판한 정지용 전집1에서 발췌- 같은 풍경이 그의 고향에 있다.   

생가 앞에도 실개천이 흐른다. 생가가 있는 하계리에서 동쪽으로 3~4㎞ 정도만 가면 대청호로 흘러드는 금강 물줄기가 나온다. 그 물가에 수북리, 석탄리 등 마을이 있다. 정지용은 고향에 머무를 때면 수북리 금강, 집 뒤 일자산 등으로 산책을 다녔다.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 가본 시인의 고향 풍경이 시 같다.  

언젠가 정지용 시인이 살던 옥천 집에서 정지용 시인의 큰 아들 정구환씨를 만나 정지용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로서의 정지용을 항상 시를 쓰는 아버지, 아주 엄격한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정구환 씨의 이야기 중 일부를 그대로 옮겨본다.  

“정지용 시인은 책상에 앉아서 시를 쓰는 법이 없었습니다. 항상 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속으로 구상을 하고 속으로 시를 쓰고 속으로 퇴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인지 시인이 쓴 140여 편의 시 모두를 외우고 있습니다. 또 다른 시인의 시도 외우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시가 곧 삶이었고, 시에 대한 열정과 정열로 가득했던 분이지요. 

저는 아버지를 따라 이곳 옥천 생가에도 자주 왔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는 아버지는 생가를 찾을 때마다 집 뒤에 있는 일자산을 자주 올랐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분명 시를 구상하고 시를 썼을 겁니다.”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소사본동. 정지용이 3년 동안 살던 집터.

정지용이 살았던 마을들
정지용이 옥천에 살 때는 시를 쓰지는 않았다. 정지용문학관 자료에 따르면 휘문고보에 입학하면서 습작을 시작했다. 그때는 소설을 썼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6년에 <학조> 창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29년 일본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해서 살던 곳이 효자동이었다. 이후 재동으로 이사를 했고 1936년에 북아현동에 둥지를 틀었다. 

북아현동집은 기와집이었다. 정지용 시인의 큰아들 정구환 씨가 북아현동집에 살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 문사 등 많은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정지용 시인을 찾았습니다.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신 편이었는데, 한 마디 하시면 좌중이 다 웃을 정도로 해학에 능통했습니다. 웃음이 섞인 말도 날카롭고 시적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정지용 시인이 살았던 북아현동 집터는 흔적 없이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    

정지용 시인이 서울을 떠나 3년 동안 살던 곳이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소사본동 89-14다. 경기도 부천 복사골문학회 구자룡 시인은 부천 천주교의 역사를 글로 남기기 위해 자료를 모으던 중 어떤 사람에게서 정지용이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 뜻밖의 일이었다. 

구자룡 시인은 정지용 시인의 큰아들 정구환 씨를 만나서 정지용 시인이 1943년부터 3년 동안 살았던 곳을 확인했다.(정지용문학관 자료에는 제2차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서울 소개령으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로 이사했고 1946년에 서울 돈암동으로 다시 이사했다고 나온다.) 

정지용 시인이 살던 소사본동 집터에 세워진 상가건물 벽에 1993년 복사골문학회가 만든 안내판이 붙어있다. 안내판에는 ‘여기는 한국 현대시의 큰 별인 정지용 선생이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약 3년 동안 은거하면서 詩心(시심)을 키우던 곳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정지용 시인은 1946년에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를 한 뒤 1948년에 녹번동에 생의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하고 살다가 1950년 납북 됐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한국전쟁 때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 되었는데 그곳에 수감 중에 폭사 당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내용이 정지용문학관 자료에 나와 있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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