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마을에서 - 대구시 달성군 화원자연휴림과 마비정마을
옛 마을에서 - 대구시 달성군 화원자연휴림과 마비정마을
  • 나무신문
  • 승인 2017.10.1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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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대구시 달성군
▲ 마비정마을 돌담에 흙벽, 그림이 어울렸다.

가을은 결실과 수렴의 계절이다. 한 생명의 기운을 열매로 모으는 결실은 씨를 퍼뜨리기 위한 자연의 순리다. 열매가 익을수록 잎과 줄기와 가지에서 수분과 진액이 빠져나간다. 마른 잎은 떨어져 쌓여 흙으로 돌아간다. 봄의 새 순이 낙엽이 되어 다음에 올 봄의 새 순을 위한 양분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겨우내 침잠했던 생명의 기운이 일제히 깨어나 지상으로 솟구치는 봄은 생동으로 분주하지만, 가을은 아무도 모르게 흙으로 돌아가는 침잠으로 장중하다. 낙엽 같은 옛 마을, 대구시 달성군 마비정마을에 다녀왔다. 

▲ 마비정마을로 가는 길에 전망이 트이는 곳이 나온다.

화원자연휴양림에서 마비정마을 가는 길
마비정마을로 가기 전에 화원자연휴양림을 먼저 들르기로 했다. 마비정마을과 화원자연휴양림은 1.8㎞ 정도 떨어졌는데, 그 길이 마을과 마을을 잇는 시골 마을 ‘마실길’ 같다.

▲ 화원자연휴양림에서 마비정마을로 가는 길에 뒤돌아 본 풍경.

화원자연휴양림은 시내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대구 지하철 대곡역 1번 출구 앞 버스정류장에서 마비정마을까지 가는 달성2번 버스가 하루에 9대 있다.) 대곡역에서 택시를 탔다.  

화원자연휴양림과 마비정마을은 멀리 있는 비슬산 자락에서 이어지는 산줄기와 청룡산 자락에서 흘러온 산줄기가 만나는, 산의 품에 안겼다. 

화원자연휴양림 입구에 쉼터와 계곡이 있다. 음식을 싸와서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인다.  

마비정마을로 가기 전에 그곳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고, 카메라도 점검하고 잠깐 쉬었다 출발했다. 

▲ 화원자연휴양림 입구 계곡.

아스팔트포장 도로에서 벗어나 좁은 농로를 따라 걷는다. 발치에 낱알 맺은 벼가 고개를 숙였다. 벼에 푸른빛이 남았으나, 이제 곧 푸른 물기가 가시고 누렇게 들판을 물들일 것이다. 

길을 따라, 논두렁을 따라 굽은 논의 경계는 왠지 경계 같지 않다. 논의 경계는 사람 사는 마을과 만나면서 이루어지며, 사람 사는 마을은 또 산기슭과 경계를 나누고 있다. 

▲ 마비정마을로 가는 길에서 본 풍경. 허수아비가 울타리에 등을 기대고 쉰다.

마비정마을이 0.9㎞ 남았다는 이정표 앞에 마을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보인다. 옛날에 한 장군이 마을 앞산에 올라가서 건너편에 있는 바위를 향해 활을 쏘면서 말에게 화살보다 늦게 도착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말은 힘을 다해 달렸으나 화살을 따라잡지 못했다. 죽임을 당한 그 말을 불쌍히 여겨 마을사람들이 정자를 세웠다는 전설이 마을 이름을 마비정마을로 만들었다. 

▲ 마비정마을로 가는 길, 길가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허수아비와 감나무

▲ 마비정마을로 가는 길, 논에 벼가 익어간다.

마비정마을로 가는 길, 멀리 밭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 한 분이 보였다. 아주머니는 동그란 등과 머리에 쓴 수건만 밭 위로 드러낸 채 허리 숙여 밭일을 하고 계셨다. 

인사를 할까 하다가 그냥 조용히 지나치는데, 밭 가장자리 울타리에 등을 기대고 팔을 울타리에 걸치고 쉬고 있는 허수아비가 보였다. 결실을 수확한 빈 밭은 더 이상 허수아비의 일터가 아니었다. 허수아비를 쉬게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주머니와 허수아비가 겪어낸, 지난 여름 뜨거웠던 생활의 터전을 지나 마을로 가는 길을 따른다.  

푸른 소나무 군락 앞에 감나무 몇 그루가 주황빛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나무에 백열전구의 불을 밝힌 것 같았다. 

어느 해인가 아버지는 집 마당에 감나무를 심으셨다. 해 마다 가을이면 감이 열렸다. 감이 익으면 상하지 않게 잘 따서, 깨끗하게 씻고, 하나씩 포장을 해서 냉장고 냉동실에 얼렸다. 손자 손녀는 다음 해 감이 열릴 때까지 할아버지의 감을 먹고 자랐다. 

이제 할아버지 보다 더 커버린 아이들은 아직도 감 이야기를 한다. 얼었던 감이 반 쯤 녹을 무렵 작은 숟가락으로 떠먹던, 그 시원하고 달콤한 감 이야기를 한다. 올해도 아버지의 마당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렸을 것이다. 

▲ 마비정마을로 가는 길, 그림이 귀엽다.
▲ 마비정마을. 낡고 무너진 담과 지붕도 그림과 함께하면 새롭다.
▲ 마비정마을. 굴뚝이 있는 옛집.

마비정마을
마비정마을은 벽화로 유명하다. 돌담에 흙벽, 낡은 집 굴뚝 담벼락… 그림 없는 곳이 없다. 마을 공동우물에서 아기를 업고 물동이를 인 한복차림의 아낙, 밭일 하는 소와 농부, 얼어붙은 시냇물 꽁꽁 언 빙판 위에서 팽이를 치고 썰매를 지치는 아이들, 물지게를 진 교복 입은 아이… 벽화를 보며 마을 골목길을 걸으면 고향이 생각난다. 

▲ 마비정마을 담벼락 그림.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도, 누구나 고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마비정마을에 있다. 고향이 생각나는 건 벽화 때문만은 아니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남근갓바위’와 ‘거북바위’ 옆에 우물이 있다. 옛날부터 있던 우물이다. 우물 위 지붕과 물을 긷는 두레박을 옛날 것 그대로 복원했다. 

▲ 마비정마을 거북바위와 남근석.

마비정마을은 예부터 청도와 가창 사람들이 화원시장을 오가고, 한양으로 나갈 때 지나는 길목이었다. 고개를 넘어 이 마을 정자에서 쉬면서 마을의 우물물로 목을 축였다고 한다. 

▲ 마비정마을 100년 넘은 살구나무.

마을 골목을 돌아다니다 100년이 넘었다는 살구나무를 보았다. 주인아저씨께 허락을 받고 마당 안으로 들어가서 살구나무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아저씨께서 딱따구리가 구멍을 파는 걸 본 적 있냐고 말씀하신다.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딱따구리는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아저씨는 날아가는 딱따구리를 따라가고, 나는 아저씨를 쫓아가고 있는데, 집 뒤안 텃밭에서 갑자기 뱀 한 마리가 나타났다. 

화들짝 놀라서 아저씨께 뱀 좀 보시라고 했더니, 아저씨는 집 지키는 구렁이라시며 느긋하게 말씀을 하신다. 

100년 넘게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살구나무와 딱따구리와 구렁이와 아저씨와 내가 마비정마을의 작은 풍경이 되는 사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시골 마을에 해 지는 풍경은 푸근하다. 돌아드는데 골목길에 낙엽이 깔렸다. 낙엽은 골목을 따라 계속 이어졌고, 그렇게 가을로 가는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 마비정마을 골목길. 낙엽이 가을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마을에서 대곡역으로 나가는 버스 시간이 40여 분 정도 남아서 마을 골목을 돌아보고 있는데, 나무판에 막걸리 같은 글씨로 ‘농주’라고 써 놓은 것을 보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돌로 만든 탁자가 보인다. 주인아저씨 작품이라고 하신다. 아저씨가 만드신 돌로 만든 탁자에서 아주머니께서 담근 막걸리를 마신다. 

아주머니는 도토리묵을 쒀서 안주로 내신다는데, 다 떨어지고 없다 신다. 그래서 아랫집에서 쑨 두부를 사다가 대신 안주로 내주셨다. 

나는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수돗가에 앉아 그릇을 씻으신다. 5대 째 그 집을 지키며 살고 계신다는 말씀부터, 이런저런 마을이야기까지, 이야기는 마당에 쌓여가고 있었고, 시간은 흘러 버스를 타러갈 때가 다 됐다. 

만 원 짜리 한 장 드리고 나오는 데 아주머니께서 검은 비닐봉지 두 개를 안겨 주신다. 

“이건 집에서 딴 감이니까 색시 주고, 이건 농사 진 땅콩 삶은 거니까 서울 가는 버스에서 드셔, 그 먼 길을 언제 가누!”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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