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구룡사
치악산 구룡사
  • 나무신문
  • 승인 2017.09.26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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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강원도 원주시
▲ 구룡사와 보호수.

원주, 복사꽃과 만둣국에 대한 추억
원주에 대한 기억은 두 가지다. 하나는 만둣국이고 다른 하나는 복사꽃이다. 만둣국이 먼저였다. 

만두를 좋아해서 만두가 유명한 곳은 웬만하면 찾아다녔다. 원주도 그랬다. 오래 전에 원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보고 놀고 먹고 다니는 데, 중앙시장 만두 얘기를 들었다. 그 길로 바로 중앙시장 만두 앞으로 달려갔다. 

▲ 구룡사 계곡 전망대와 그 아래 웅덩이

시장에 만둣국골목이 있었다. 식당에서 팔기도 했지만, 시장 골목에 줄지어 자리잡은 만둣국 노점이 인상적이었다. 

노점 한 쪽에 불과 물과 육수와 반죽과 만두소를 익숙한 자리에 배치하고 직접 만두를 빚고 삶는 아주머니들의 그 공간은 오래된 그것만이 가질 수 있는 편안하고 우아한 세계였다.

▲ 구룡사 계곡.

만두소는 거칠었다. 만두피는 두꺼웠다. 육수는 진했다. 하지만, 만두피는 진한 육수를 적당히 머금어 거친 만두소를 질지도 되지도 않게 촉촉하게 적시기에 알맞게 두꺼웠다. 육수는 두꺼운 만두피에 스며 만두소에 그 맛이 전해질 수 있을, 딱 그 정도였다. 만두소는 만두를 씹을 때 두꺼운 만두피와 섞여 간과 맛과 씹는 식감을 알맞게 맞춰줄 만큼 만 거칠었다. 

각각의 조건만 보면 강하고 세고 거칠고 진한데, 그 조건이 입안에서 버무려지는 순간 조화를 이룬다. 맛이 있고 없고는 둘째 문제였다. 

▲ 구룡사 계곡물이 하얗게 부서지며 흐른다.

그렇게 처음 접한 원주 만둣국의 추억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원주에 가면, 웬만하면 중앙시장 만둣국골목에서 만둣국을 먹었다. 

복사꽃에 대한 추억은 어느 해 봄에 만들어졌다. 한 때 복사꽃 피는 마을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중 한 곳이 치악산 자락 복사꽃 마을이었다. 

내가 간 날은 복사꽃 축제가 끝나는 날이었다. 그 마을에 도착하니 동네 장정들은 천막을 걷고 아줌마들은 그릇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을 원로들은 동구나무 아래 자리를 깔고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 구룡사 계곡 소나무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 나는 손님이었다. 외지에서 뜬금없이 찾아온 손님을 웃으며 반기는 마을 사람들이 고마웠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동구나무 아래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원로 중 한 분이 나를 불렀다. 자리에 앉아 막걸리 한 잔 받았다. 

복사꽃 피는 사월 중순 반짝 더위에 목이 말랐던 참이라 한 사발 벌컥벌컥 들이켰다. 원로들은 술 잘 먹는다며 또 한 사발 따라주는 것이었다. 막걸리 맛도 좋았지만 더 좋았던 건 술판 가운데 있었던 안주였다. 안주 쟁반에 인삼과 꿀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기분 좋게 막걸리를 몇 사발 더 먹고, 인삼을 꿀에 찍어 몇 뿌리 더 먹고 자리를 일어서는데 마을 언덕에 복사꽃 분홍빛이 햇볕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이 아찔했다. 오래 전 일이다. 

▲ 구룡사 계곡 길 가에 비스듬하게 자란 소나무

구룡사 가는 길
그 이후로도 원주는 가끔 들렀다. 원주가 최종 목적지인 적도 있었고, 중간 경유지였던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일정에 맞으면 원주 중앙시장 만둣국을 먹었다. 치악산 아래 복사꽃 마을은 그 다음에는 가보지 못했다. 

그리고 한 동안 원주를 잊고 지내다 근래에 원주에 갈 일이 생겨 다녀왔다. 어찌어찌해서 거나하게 술을 마셨고 새벽별을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참 맑은 공기에 별들도 총총했다. 그 별들 아래서 노래를 불렀다. 

일정 때문에 다음 날 오전 8시에 일어나야 했다. 눈 감은 지 3~4시간 만에 눈을 떠야 했다. 잠은 그 정도면 괜찮은데 술이 덜 깼다.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구룡사였다. 

구룡사는 원주 시내에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오래된 절이다. 구룡사 입구에 도착해서 상가단지를 지나 계곡 옆 숲길로 접어들었다. 넓고 평판한 길에 키 큰 나무가 하늘을 가린 걷기 딱 좋은 길이었다. 

▲ 구룡사 입구 상가단지에서 먹은 막걸리

술기운에 오감이 더 예민해졌다. 눈은 맑아지고 또렷해져서 푸른 숲의 빛과 나뭇잎의 테두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계곡에서는 부서지는 물의 향기가 물씬 풍기고, 풀 냄새 흙냄새가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드는 햇볕이 살갗에 내려앉는 촉감이 보드라웠다. 하얗게 부서지는 계곡 물소리,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 새소리, 사람들 발자국 소리가 동시에 밀려와 음률이 되었다. 이 모든 감각이 한꺼번에 가슴에 들어차는 순간, 나는 텅 비었다. 

▲ 구룡사 입구에서 구룡사를 오가는 길

구룡사에서 술이 깨다
어느 새 구룡사 앞이었다. 구룡사는 치악산 비로봉에서 학곡리 쪽으로 약 6㎞ 떨어진 곳에 있는 절로,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연못이 있었다. 의상대사는 그 연못 자리를 명당이라 여기고 그곳에 절을 짓기로 했다. 그런데 그 연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 용이 있으면 절을 세울 수 없었기에 의상대사는 아홉 마리의 용과 도술 겨루기를 했다. 의상대사는 도력으로 용들을 물리치고 그 자리에 대웅전을 지었다. 의상대사는 용이 떠난 그 자리를 기리기 위해, 아홉 마리의 용이 있었다고 해서 구룡사(九龍寺)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구룡사 대웅전

그 이후 조선시대에 구룡사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폐사 위기의 절을 되살리려면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의 혈을 끊어야 한다는 어느 노인의 말을 들었지만, 절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도승이 나타나 끊어진 거북바위의 혈을 이어야 절이 흥한다고 해서 절 이름에 ‘거북 구(龜)’자를 넣어 구룡사(龜龍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절 앞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인다. 230여 년 된 은행나무로 둘레 3.5m, 높이 25m다. 보호수로 지정된 그 나무를 지나서 탑과 미륵불 사이에 있는 사천왕문을 지난다. 

▲ 구룡사 보광루

사천왕문을 지나면 보광루가 나온다. 보광루는 강원도 유형문화제 제145호다. 주춧돌 위에 놓인 기둥이 높다. 기둥 위에 지어진 보광루 건물 아래를 통과해야 대웅전이 나온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던 자리, 대웅전은 용의 기운은 간데없고 초가을 따듯한 햇살만 온화했다.  

▲ 구룡사 사천왕문

대웅전 앞에 앉아 햇볕을 즐기는 사이 마지막 남아있던 술기운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왔던 대로 보광루 아래를 지나 사천왕문을 통과해서 매점 앞 계곡에 앉아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른 일행들을 기다렸다. 

▲ 황장금표 표석

일행들과 함께 돌아가는 길, 올 때 잠깐 스쳤던 황장금표 표석 앞에 섰다. 황장금표란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반인들의 벌목을 금지하는 표시로 설치한 표시다. 대게 돌에 새겨 표시하는 데, 이곳의 황장금표 또한 돌에 새겼다. 표석 일대가 황장목 구역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황장목이란 나무의 중심 부분이 누런 색깔을 띠며 나무질이 단단한 질이 좋은 소나무다. 

조선시대에는 질 좋은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 황장목 관리에 특별히 관심을 썼었다. 치악산 황장목 구역은 강원감영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원주에 강원도 감영이 있었다.) 관리에 유리하고, 뗏목을 만들어 섬강과 남한강을 거쳐 서울로 운송하기에도 편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전국 60개 황장목 봉산 가운데 이름 난 곳 중 하나였다고 한다. 황장금표는 강원도 기념물 제30호다. 

황장금표를 보고 숲길의 마지막을 지나면 상가단지다. 어느 식당 야외 의자에 앉아 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분홍빛 복사꽃 빛나던 그때처럼 높이 자란 소나무 한 그루가 멀리서 빛나고 있었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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