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성곽길을 따라 걷다(2) -낙산, 남산 구간
한양도성 성곽길을 따라 걷다(2) -낙산, 남산 구간
  • 나무신문
  • 승인 2017.08.1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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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한양도성 순성길
▲ 낙산공원 한양도성 성곽 밖에서 본 풍경. 여름 밤에 산책하기 좋다.

지난 호에 이어 한양도성 순성길 두 번째 이야기다. 낙산과 남산을 걸어볼 차례다. 한양도성 남대문인 숭례문에서 한양도성 순성길 18.6㎞ 걷기를 마친다. 

인왕산, 백악산(북악산), 낙산, 남산을 지나는 조선의 수도 한양도성의 울타리 18.6㎞를 돌아보는 일은 한 번 쯤 해볼 만하다. 

성곽길에서 만나는 오래된 작은 마을, 그 마을에 사는 착한 사람들, 곳곳에 숨어 있는 역사와 문화가 깃든 명소들, 전망 좋은 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풍경, 서울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아름답다.  

▲ 낙산공원으로 가는 길, 한양도성 성곽길에서 본 풍경. 낙산 기슭에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낙타를 닮은 산, 낙산 
한양도성 순성길 낙산 구간은 한양도성 동대문인 흥인지문과 동소문인 혜화문 사이다. 그 사이에 있는 낙산 능선을 따라 성곽길이 이어진다. 

낙산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5대 명소 중 한 곳이었다. 그만큼 경치가 좋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푸르른 숲이 어울려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었다. 그 경치를 두고 쌍계동이라고 불렀다. 

1500년대 중반에 한양에 살던 최경창이라는 사람이 지은 시에 낙산은 구름 안개 자욱한 동쪽 봉우리로 묘사됐다. 신장이라는 사람은 낙산 기슭에 지은 정자 이화정에서 술에 취하여, 삼십 년 전 어느 봄날 여기 와서 놀았는데 그때 함께 춤추고 놀던 사람들을 볼 수 없다는 내용의 시를 짓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부터 낙산은 청풍명월의 기운을 잃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낙산에는 조선 사람들이 움막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 움막촌을 토막촌이라고 불렀다. 나라 잃은 사람들의 고달픈 일상이 그곳에도 모여 있었다.

낙산은 낙타산 타락산 등으로 불렸다. 낙타산은 산의 모양이 낙타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타락산(駝駱山)의 ‘타(駝)’와 ‘락(駱)’ 또한 낙타라는 뜻이다. 

타락산의 유래에는 또 다른 설이 있다. 조선시대 궁궐에 우유를 공급하던 유우소(乳牛所)가 낙산에 있었다고 해서 타락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타락은 우유의 다른 말이다.  
 

▲ 흥인지문. 사진 왼쪽에 한양도성 성곽이 보인다. 성곽 안쪽 길로 걸으면 된다.

낙산을 넘다
흥인지문에서 출발했다. 성곽 안쪽으로 걸었다. 걷다가 뒤돌아 본 풍경 속에서 흥인지문이 새롭게 보인다. 도심의 빌딩과 바쁘게 오가는 자동차들 가운데 흥인지문이 당당하다. 

성곽을 따라 올라가면서 간혹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때마다 흥인지문과 그 주변 풍경이 다르게 보인다. 

▲ 흥인지문 옆 한양도성 성곽 안쪽 길로 올라가다가 돌아본 풍경

성곽 안쪽은 종로구 종로6가다. 성곽 밖은 종로구 창신동이다. 종로6가 낙산 기슭에 기와집이 몇 채 남았다. 성곽 옆 정자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여 더위를 난다. 느린 부채질에 바람이 순하게 인다. 옛 이야기에 시간이 흘러간다. 

성곽 안쪽 마을 중에 벽화골목으로 유명한 이화마을이 있다. 좁고 가파른 계단과 골목길, 축대와 지붕 사이 골목길, 좁은 골목길이 가로 세로로 얽혔다. 생활의 편린과 벽화가 서로 어울린다. 골목 곳곳에 카페와 식당이 들어섰다. 어느 한 곳에서 머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일렀다. 

19년 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을 구멍가게를 지나 카페가 있는 골목을 벗어나면 정자가 있다. 전망 좋은 곳이다.

▲ 한양도성 성곽이 숭례문 쪽으로 이어진다.

동대문 일대, 남산 언저리, 서울도심, 평창동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남산, 안산,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줄기가 서울을 품듯 날개를 펼친 형국도 보인다.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로 해가 진다. 해 진 뒤 미명(微明)에 의지해 성곽길을 따라 낙산공원에 도착했다. 도로를 내면서 성곽이 끊겼다. 끊긴 성곽 위에서 도로 건너 다른 쪽 성곽을 바라본다. 성북구 일대는 물론, 멀리 북한산 능선도 보인다. 

성곽을 따라 내리막길을 걷는다. 성곽 위로 달이 떠올랐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달은 빛난다. 성곽을 비추는 조명에 낮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달빛 아래 서울 도심의 불빛이 반짝인다.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낙산에 부는 선선한 바람 속을 걷고 있었다.     

낙산의 밤풍경에 취해 도착지점인 혜화문까지 가지 못했다. 다음 날 다시 낙산을 오르는데 소나기를 만났다. 비가 제법이다. ‘훙훙’ 부는 바람에 먹구름이 서울 도심 하늘을 뒤덮었다. 사위가 컴컴해졌다.  

▲ 남산 한양도성 성곽 안

동대문 일대와 남산, 안산, 인왕산, 북악산을 아우르는 옛 한양도성 전체가 먹구름에 덮였다. 하늘에서 지상의 어느 한 곳으로 번개가 내리꽂혔다. 번쩍이는 불빛에 먹구름 아래 서울 도심이 순간 반짝거렸다. 공기를 찢는 천둥소리가 뒤를 따랐다. 빗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나워졌다. 

어제는 일몰, 오늘은 소나기다. 전망 좋은 곳에서 만난 파란 하늘, 울긋불긋 노을, 먹구름 빗줄기, 다 감동적이다. 

‘감동(感動), 깊이 느껴 마음이 움직이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작살 같이 내리 꽂히는 빗줄기 속으로 들어갔다. 낙산공원 한양도성 성곽 밖에 난 길을 따라 내리막길을 걸었다. 먹구름 아래 비의 장막 저편에 혜화문이 보였다. 
 

▲ 숭례문

남산을 넘어 숭례문에서 발길을 멈추다
소나기에 젖었던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한양도성 순성길 남산 구간을 걸었다. 이 구간은 한양도성 동대문인 흥인지문에서 광희문을 지나 남산으로 올라가서 서울N타워와 남산봉수대를 지나 한양도성 남대문인 숭례문으로 내려오는 길이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인경산(引慶山)이었다. 말 그대로 풀어보면, ‘경사스러운 일을 끌어들이는 산’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남산의 산신에게 목멱대왕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제사를 지내면서부터 목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한양도성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그냥 남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흥인지문에서 출발해서 광희문을 보고 국립극장 방향으로 간다. 국립극장 앞을 지나 아스팔트 포장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남산순환버스가 다니는 길이다. 

국립극장에서 1.5㎞ 정도 거리에 전망 좋은 곳이 나온다. 전망대 안내판에 남산 포토아일랜드(남측지점)라고 적혔다. 서울의 남쪽 일대와 청계산, 관악산, 여의도, 서울월드컵경기장, 서울N타워 등이 보인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남쪽)에서 본 일몰

이곳은 시원하게 펼쳐지는 전망 자체도 좋지만, 해질녘 풍경이 매력적이다. 서울N타워와 노을 피어나는 서쪽 하늘을 한눈에 넣는다. 

이곳에서 800m 정도 더 올라가면 남산 정상이다. 성곽 아래 키 작은 풀꽃이 자란다. 아무렇게나 자란 풀꽃이 성곽과 어울렸다. 그 풍경 앞에서 남산도 목멱산도 아닌 인경산이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600여 년의 역사 앞에 피어난 작은 풀꽃 앞에서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았다. 

남산순환버스 종점을 지나 남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남산 정상 전망 좋은 곳인 서울N타워 옆 전망대로 가기 전에 정상 광장 오른쪽에 있는 전망대를 먼저 들른다. 인왕산, 백악산, 낙산을 아우르는 조선시대 한양도성 자리가 한눈에 보인다. 서울 도심 빌딩들 사이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 등 조선시대의 흔적들이 점점이 박혔다. 

▲ 남산 서울N타워 옆 전망대에서 본 풍경

서울N타워는 1969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75년에 완공했다. 타워 높이가 236m 정도 된다. 입장료를 내고 전망대로 올라가면 사방으로 펼쳐진 서울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서울N타워 옆 전망대로 발길을 옮긴다. 전망대 난간에 이른바 ‘사랑의 자물쇠’가 가득하다. 봉인된 사랑의 이야기는 영원할 것이다. 저렇게 많은 속삭임이 바람결에 잠긴다. 

팔각정과 봉수대를 지나 성곽을 왼쪽에 두고 내리막길을 걷다보면 잠두봉포토아일랜드(북측지점)가 나온다. 빌딩이 빽빽하게 들어선 서울 도심을 본다. 빌딩 사이로 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장난감 같다. 

▲ 남산 정상 전망 좋은 곳에서 본 풍경. 종묘, 창덕궁, 창경궁이 보인다.

백범광장 쪽으로 가는 길, 안중근의사기념관 부근에 와룡매 안내판이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와룡매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반출된 나무의 후계목이다. 임진왜란 때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창덕궁에 있던 나무를 일본으로 가져가서 한 사찰에 심었다. 그 사찰의 주지 히라노소죠(平野宗淨)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조선이 겪었던 피해에 대한 참회의 뜻으로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 후계목 반환을 제의했다. 이에 1999년 안중근 의사 순국 89주기를 맞아 홍매화 한 그루, 백매화 한 그루를 심었다.  

▲ 남산 봉수대.

성곽 안팎을 보며 걷는 길, 멀리 숭례문이 보인다. 조선시대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걷는 순성길, 성곽이 남아 있는 구간도 있고 도로와 건물에 흔적 없이 사라진 구간도 있었다. 오래된 역사와 현재 사람들의 생활이 하나였던 그 길, 18.6㎞의 마지막을 숭례문에서 마친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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