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지키는 나무들2
대한민국을 지키는 나무들2
  • 나무신문
  • 승인 2017.07.26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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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전국

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이다. 시대의 역사가 나이테처럼 겹겹이 쌓인 이야기의 보고다. 나무와 사람 사이에는 공시(共時)·통시(通時)적인 유대가 있다. 나무가 품은 시간을 풀어내면 사람의 이야기가 보이고,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풀어내면 나무는 빛난다.   

▲ 서울 여의도 샛강 느티나무 고사목과 귀신바위. 사진의 나무 옆에 고사목이 있고 그 주변에 바위가 있다.

서울 여의도 샛강 느티나무 고사목
신길역 뒤 샛강다리 초입 부분 다리 아래 올림픽도로 옆을 보면 고사한 굵은 나무의 밑동이 남아 있다. 그 나무에는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왕비와 얽힌 이야기가 서려있다.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왕비가 이곳을 지나다가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느티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실제로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 노량진(옛날 한강 노량진이 있었던 곳을 알리는 표지석이 현재 지하철 9호선 노들역 주변 배수지공원에 있다.)에 도착한 뒤 시흥을 지나 용인으로 갔다. 당시 한강을 건널 때 배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현재 한강다리 부근에 배를 이어 다리의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널빤지를 얹어 상판을 만들어 강의 남북을 잇는 다리를 완성했다. 

▲ 여의도 샛강과 버드나무숲, 그리고 빌딩들.

한강대교 남단에 용양봉저정이 있는데 정조가 배로 만든 다리를 건넌 뒤 그곳에서 쉬었다고 전해진다. 

정조대왕의 왕비가 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지는 곳은 지금은 올림픽대로와 건물 등이 들어서서 옛 풍경은 볼 수 없지만 예로부터 이곳은 푸른 강물이 흐르고 강가에 절벽이 솟은, 경치좋은 곳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왕비가 심었다고 알려진 느티나무 고사목 주변에는 커다란 바위가 몇 개 있다. 사람들은 그 바위에 귀신바위라는 이름을 붙였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풍경과 흥에 취해 놀다가 실족해서 강물에 떨어져 죽었다. 그 이후로 그곳에서 계속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바위 이름을 귀신바위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한강이 개발되고 도로가 생기면서 옛 풍경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샛강과 버드나무 푸른 숲이 만들어 내는 경치는 아름답다.      

괴산읍내 느티나무 
1919년 고종황제 서거 이후, 그해 3월1일 정오를 기하여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19년 3월19일 충북 괴산군 괴산읍 장터 느티나무 아래에 6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경찰은 주동자를 검거, 투옥했다. 이에 군중들은 투옥된 지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다시 한 번 거리에 나섰고 돌을 던지며 일제경찰과 맞섰다. 괴산에 있던 일제경찰들로는 만세운동의 물결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일제경찰은 인근 충주의 병력을 동원해서 만세운동에 나선 사람들을 가까스로 해산시킨다. 

▲ 괴산 읍내 느티나무.

하지만 만세운동의 불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만세운동은 3월24일, 3월29일, 4월1일 등 세 차례에 걸쳐 계속되었고 참여 인원도 700여명, 1500여명 등으로 늘어났다. 

괴산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가 있었다. 당시 괴산 만세운동의 집결지였던 그곳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아직도 남아 있다. 

▲ 괴산 읍내 느티나무 아래에 있는 만세운동유적비.

당시 이 나무 주변에 괴산 장터가 있었다. 지금은 장이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아직도 이 나무 그늘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 여름 더위를 식힌다. 

나무 옆 가게에서 하드 하나 사서 나무 그늘 아래에 앉는다. 뙤약볕도 그늘 바람이면 선선하다. 하드가 더운 속을 식혀준다. 여름도 시원하다.   

충북 영동군 학산면 화합의 나무 
충북 영동군 학산면 마을 뒷산에 백로와 왜가리가 서식한다. 그 마을 입구에 ‘화합의 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커다란 왕버들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나무는 약 250여 년 전에 하천 제방을 따라 심은 여러 왕버들나무 가운데 하나다. 

이 나무가 특이한 것은 300살을 바라보는 나이도 아니고 엄청나게 큰 크기도 아니다. 이 나무 하나에 11종의 서로 다른 생명이 공존공생하고 있는 것이다. 

▲ 충북 영동군 학산면 '화합의 나무'.

이 나무에 깃들어 사는 다른 생명은 산벚나무, 쥐똥나무, 까마귀밥여름나무, 이스라지, 올괴불나무, 산뽕나무, 팽나무, 산사나무, 겨우살이, 환삼덩굴, 쑥 등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마을 뒤편 산에 깃들어 사는 백로와 왜가리들이 오가며 씨를 전파한 것으로 추정한다. 

300년 세월동안 마을 제방 가에 서서 마을을 지키고 있으며 11종의 다른 종자를 품고 함께 잘 사는 이 나무가 더불어 사는 마음을 일깨워 준다.  

지금은 푸른 잎이 무성하겠지! 더불어 사는 푸르른 생명 한 번 보러 가야겠다. 
 
경남 고성군 여우바위봉 가는 길 석문 위 어린 소나무

▲ 경남 고성군 석문과 그 위에 자란 어린 소나무.

경남 고성군 갈모봉 정상 360m 전에 갈모봉 정상으로 가는 길과 여우바위봉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이 있다. 

여우바위봉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어 조금만 가면 바위절벽(아래서 보면 절벽 바위가 뚫린 석문이다) 위에 어린 소나무 한 그루가 자랐다. 누가 그곳에 일부러 심은 것도 아니고 씨가 바위틈에 떨어져 자라난 것 같다. 

어린 소나무가 여행자들에게 좋은 기운을 선물한다. 절벽 끝에 자라나 푸른 산천을 내려  보고 있는 그 풍경이 멋지고 아름답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푸르른 생명을 피워낸 그 기상이 어린 나무에서 뿜어 나온다. 

세월이 흘러 100년 200년이 지난 뒤에 누군가 이 길을 지날 때면, 어린 소나무가 아니라 멋지게 자라난 소나무의 자태로 여행자의 마음에 남을 것 아닌가! 

어린 소나무의 자태가 저러한데 앞으로는 또 어떠랴! 부디 낙랑장송으로 자라나 큰 기상으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품어주길…

▲ 경남 고성군 여우바위봉 가는 길 석문 위 어린 소나무.

율곡 이이 집터의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학자의 나무, 청백리의 나무, 선비의 나무 등으로 알려졌다. 궁궐이나 서원, 향교 등에 많이 심었다. 임금이 기개 높은 청백리 선비의 집에 회화나무를 하사하는 일도 있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7-28 일대는 조선시대 율곡 이이가 살던 집터다. 그곳에 거대한 회화나무 한 그루 남아 있다. 

▲ 율곡 이이가 살던 집터에 있는 회화나무.

회화나무 앞에 있는 안내판에 따르면 나무가 있는 곳이 독녀혈(과부골)이다. 어떤 스님은 독녀혈은 3년에 한 번 씩 용틀임을 하는 데 그때 액운을 막기 위해서는 큰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나무가 회화나무였던 것이다. 

하지만 회화나무는 1700년대에 심은 거고 이율곡은 1500년대에 죽었다. 이율곡 같은 큰 인물이라서 독녀혈의 용틀임의 기운에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 기운을 좋게 활용한 것은 아닐까? 

풍수도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아닐까? 회회나무 앞에서 모든 것은 다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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